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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Nov 03. 2024

<흑백 요리사>와 <비극의 탄생> (2)

소멸의 의미와 요리를 초월한 경험

* 1편에서 이어집니다. 1편을 읽지 않은 분은 읽고 오시길. 


https://brunch.co.kr/@iyooha/101




우리는 이전 글에서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을 비교한 다음, 요리와 미식이 예술 담론의 직선 위에서 어디쯤 위치하는가 하는 논의를 했다. 일단 우리는 요리를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적 예술 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으리라는 결론을 냈고, 따라서 미식은 디오니소스적 예술 경험이라 할만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지난 글의 논의를 마쳤다. 아마 니체를 읽은 사람이라면 여기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래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아래의 얘기는 동의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철학 전공자도 아니고, 단지 취미 독서인에 불과하니, 늘 그렇지만 반박 시 님 말이 맞다. 하지만 우선은 내 이야기를 들어봐 주면 좋겠다. 




조선 팰리스의 유재덕 셰프는 "요리는 찰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한다. 요리는 보존되지 않는다. 요리는 체험자에게 먹힘으로써 소멸한다. 즉 요리는 찰나에 존재한다. 셰프의 손을 떠나, 미식 체험자의 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존재한다.


유재덕 셰프 (c) 인터파크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는 죽음으로서 온전함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죽기 전까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존재하지만 존재 전체관점에서는 우리는 아직 미래의 존재를 획득한 상태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불완전하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아직 앞으로도 매 순간 연속으로 존재할 미래의 우리는 획득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완전한 우리를 획득하는가? 바로 시간 선 위에 우리를 존재자로 하여 생성되는 새로운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라는 선분이 완결될 때이다. 바로 죽음의 순간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죽는 순간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유재덕 셰프는 "요리는 사라짐으로써 완성되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요리는 체험자에게 먹힘으로써 완성되고, 요리의 경험은 요리가 죽는 그 순간에 오감을 통해 체험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요리는 소멸함으로써 자신의 선분을 완성한다. 


그렇다면 소멸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멸로 완성되는 예술이 갖는 철학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시작한다. 조금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꾹 참고 끝까지 읽으면, 소멸의 의미에 대한 놀라운 통찰에 닿을 수 있다. 내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사진: Unsplash의 David Clode


아름다운 해변을 상상해 보자. 바다는 수많은 파도를 품고 있다. 잔잔한 파도가 수면으로 밀려오더니, 물방울들이 해변에 쏟아진다. 그리고 곧 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상상이 되는가?


쇼펜하우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개체들, 그러니까 나나 당신, 쇼펜하우어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 사과나 나무 같은 생명을 품은 것들, 바위나 숲 같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물방울이나 거품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임의적이다. 우리는 우주를 이루는 수많은 거품 중 하나일 뿐이다. 물방울과 거품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듯, 우리도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물방울과 거품이 바다로 돌아가듯, 우리는 우리가 온 곳으로, 즉 우주로 돌아간다.


우리가 우주에서 왔고, 언젠가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다. 이 문장은 물리적 서술이다. 원자는 불멸한다. 당신의 손톱 끝을 이루고 있는 탄소 원자는 원래 먼 옛날에 먼 우주에 있는 어느 적색거성 내부의 핵융합반응 때 만들어졌다. 그 탄소는 태양의 중력에 이끌려 지구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시아노박테리아가 되었다가 삼엽충에게 먹혔다가, 삼엽충이 내뿜은 이산화탄소가 되었다가, 트리케라톱스, 원시고래, 사과를 거쳐 당신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포도당의 일부로 몸속을 떠돌다 손가락에 난 상처를 메우려 DNA의 정보를 단백질로 만드는 과정에서 피부 세포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진짜로 우주에서 온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 혹시 음식물 처리기가 집에 있는가? 최신형 음식물 처리기는 열어 보면 약간의 흙이 있다. 그 안에 남은 음식물 쓰레기를 붓고, 한참 있다가 열어보면 음식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고, 대신 흙의 양이 늘어나있다. 흙 안의 미생물이 음식물을 흙으로 분해하는 것이다. 음식물 처리기가 가득 차면 20% 정도만을 남기고 나머지 흙을 일반 쓰레기로 분리배출하면 된다. 모든 유기체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미생물들에 의해 분해되어 흙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면 어떻게 될까? 


우리 또한 유기체이다. 음식물 처리기에서 일어나는 일과 똑같은 일이 우리의 몸을 대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흙으로 분해된다. 우리 몸의 99%는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인으로 되어 있다. 남은 1%의 85%는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으로 되어 있는데, 이 원자들은 우리가 죽는다고 소멸하지 않는다.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고, 벌레들에 먹히며 그들의 일부가 되거나 흙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문장 그대로, 물거품이 바다로 돌아가듯, 우주로 돌아간다.


물방울이 돌아가는 곳을 ‘바다’라고 한다면 우리가 돌아가는 곳은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나와 당신과 지구와, 태양계와 우리 은하와 우주 전체를 포함한 모든 것,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근원적 일자라고 부른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소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소멸은 실은 소멸이 아니라, 무언가와의 합일인 것이다. 무엇인가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 우리가 분해되어 없어진 자리에서 꽃나무는 결실을 맺는다. 소멸은 소멸이 아니라 합일이며, 이후에 있을 새로운 탄생의 시작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멸의 의미다. 


음식의 소멸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경험하면(먹으면) 내가 삼킨 음식은 80일 안에 내 몸을 구성하는 새로운 세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재구성된다. 우리는 햄버거를 '먹었다'라고 표현하며, 불변의 개체인 내가 햄버거를 소멸시킨 것으로 간주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햄버거를 먹는 행위는 나와 햄버거가 물리적, 화학적으로 합일하는 순간이다. 햄버거의 소멸은 소멸이 아니라 합일이며, 이후에 있을 새로운 탄생의 시작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멸의 의미다. 




이제 유재덕 셰프의 '요리는 소멸의 예술'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겠다. 나는 요리를 경험하는 것이 여전히 음악을 경험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하겠다. 우리는 다시 <비극의 탄생>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니체로부터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관점에서는 죽음이지만, 우주의 관점에서는 우주와의 합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우주로부터 태어나, 우주를 살다가, 마지막엔 우주로 돌아간다. 니체에 의하면 우리는 우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어떤 독립적 개별이 아니라, 임시로 구분된 찰나적 개별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이러한 생각을 해내기 어렵다. 이런 생각을 하기엔 세상엔 개별이 너무 많고, 우리의 삶은 충분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미시적 삶을 살고, 우주나 근원적 일자는 생각하기엔 터무니없이 큰, 우리의 일상을 초월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음악이 이 근원적 일자와 우리를 만나게 한다고 얘기한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감정이 최고로 고조되는 클라이맥스에서 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완전히 무엇인가에 완전히 몰입하여 무언가와 합일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 말이다. 나는 없고, 무한에 가까운 감정의 폭발만 존재하는 순간, 이러한 순간을 니체는 ‘도취’의 순간이라고 표현한다. 


니체는 우리가 도취를 느낄 때 근원적 일자를 마주한다고 말한다. 의식적으로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감정 폭발의 순간 ‘나’라는 개체는 소멸한다. 나의 세계는 무한으로 확장되고, 그 감정만으로 가득 메워진다. 그 격렬한 감정 속에서 어제 먹은 햄버거나, 지난달에 본 중간고사나, 다음 달에 출시될 애플워치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소멸하는 순간 분절된 세계도 함께 소멸한다. 오직 폭발한 감정만으로 통일된 세계 속에서, 나는 내가 실은 근원적 일자의 일부이며, 언젠가 거기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니체는 말한다. 음악적 경험은 음악 그 자체를 초월한다. 이것이 음악적 도취에 대한 니체의 해석이다. 나라는 오해적 개체를 초월해 근원적 일자, 혹은 그 일부에 접촉하는 것, 나라는 개체의 유한성과 비극성을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도취가 일깨워주는 쾌감이라는 것이 니체의 설명이다.




눈물을 터트리는 쯔위 (c) JTBC


꽤나 인기 있었던 요리 예능 <냉장고를 부탁해>의 어떤 장면에서, 트와이스 쯔위는 이연복 셰프의 요리를 먹고 눈물을 흘렸다. 쯔위가 방송에서 울음을 터트린 것은 그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엄마의 식탁에서 맛보았던 그 요리가 이연복의 작품으로 재현되었을 때, 프로정신 투철한 원숙한 아이돌조차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그리움을 그 순간 억누르지 못한 것이다. 


무엇이 쯔위를 울렸을까? 신선한 재료였을까? 이연복 셰프의 솜씨였을까? 절묘한 간이나 이븐 한 채소의 익힘 정도였을까?


우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쯔위를 울린 것은 그 맛에 대한 기억이다. 그 음식과 엄마에 얽힌 기억이다. 음식을 경험하는 것은 단지 음식을 경험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음식에 대한 경험은 음식 그 자체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구조가 음악적 도취와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적 도취가 나라는 개체를 초월해 근원적 일자에 닿는 다면, 음식에 대한 경험은 음식 자체를 초월해 나에게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종강파티 뒤풀이 다음 날 아침, 숙취에 시달릴 때 엄마가 끓여 준 북엇국을 후루룩 마신 순간. 3대 3 음료수 내기 농구를 마치고 땀에 젖어 1.5리터짜리 이온 음료를 들이켜는 순간. 추운 겨울날, 레스토랑에서 전채로 내준 따뜻한 양파수프를 두고 연인과 마주한 순간. 더운 날씨만큼 많았던 일정에 시달린 날 저녁, 오래된 친구가 따라준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은 순간. 


음악적 경험이 음악 자체를 초월해 있는 것처럼, 이러한 경험들은 모두 그 요리나 음식 자체를 초월해 있다. 그렇기에 음식은 우리에게 본연의 목적인 맛을 제공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음악적 경험이 음악 자체를 초월해 있듯, 음식에 대한 경험은 이렇게 음식 자체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흔히 '파인 다이닝의 경험은 문에 들어서는 순간 시작된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다. 


<라따뚜이>의 음식 평론가 이고는 음식을 먹고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라따뚜이>의 제작진도 요리에 대한 경험은 요리를 초월해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c) Disney




참 긴 얘기를 썼다. 나는 먹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음식을 즐기는 방식은 음식을 먹는 것뿐만이 아니다. 늘 그 음식과 어울리는 와인(혹은 다른 종류의 술)과 음식을 페어링 하고, 먹을 장소를 정돈하고, 음악이나 뉴스처럼 공간을 채울 소리를 준비하고, 그 음식을 나누고 싶은 사람(가족이나 친구들)과 음식을 함께 준비하며 함께 나누어 먹는다. 


일 때문에 중국 생활을 오래 했던 내 영혼의 파트너 김덕영 감독은 내가 만들어주는 토마토 파스타에 이탈리아 와인을 '와구와구' 곁들여 먹겠다며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우리 집에 찾아오곤 했다. 김덕영 감독에게 내가 만든 토마토 파스타와 프리미티보 와인은 밀가루와 토마토소스, 포도로 만든 알코올음료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먹는 것을 좋아하고 더 맛있게, 더 즐겁게 음식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취향의 의미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매우 예술적인 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요즘 <흑백 요리사> 때문에 파인 다이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인스타그램에 멋진 파인다이닝 요리들을 찍어 올리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미식이 가진 예술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오늘 해 지기 전에 밖이 내려다 보이는 테이블에 마나님과 함께 앉아 샌드위치를 곁들여 데일리 샴페인을 딸 것이다. 긴 글을 마친다.  




https://brunch.co.kr/brunchbook/like-fouc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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