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베 스타인의 환희>, 마르그리트 뒤라스
<롤 베 스타인의 환희>를 다 읽었다. 아마 현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은 난해한 프랑스 현대 문학을 접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이 책은 이번에 진행하는 독서모임 [보탬] 시즌 사이의 인터루드 소재라 읽었는데, 나는 이 책의 줄거리를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빗대어 소개해보려고 한다.
라캉은 이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예술가는 항상 정신분석가보다 앞서 가며, 예술가가 길을 열어주는 곳에서 정신분석가는 할 일을 잃는다. (...)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내가 가르치고 있는 것들을 이미 혼자 터득하고 있다."
정신분석의 대가인 라캉은 이 소설이 정신분석보다 더 정신분석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그 거만한 라캉이 이렇게까지 찬사를 바쳐야 했을까?
뒤라스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 어떤 의도나 해석의 제시를 거부하며 “이해할 건 아무것도 없다. 이걸로 그쳐라. 늘 어린아이처럼 묻지 말라"라고 했다고 하지만, 우리에겐 늘 아폴론적 오독의 권리가 있지 않은가?
(이 글은 우리 독서모임 [보탬] 멤버인 양민정님의 독후감을 일부 인용하고 있다. 민정님의 원문은 댓글에 링크한다)
생명이 위중했던 교통사고 같은, 엄청난 사고나 재난을 겪은 사람들 중에는 가끔 사고 당시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증상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겪는 증상이고, 머리에 충격이나 외상을 입어서 발생하는 증상이 아니라, 무의식이 기억의 인출을 거부하는 방어기제를 발동시켰기 때문에 발생하는 증상이다. 이것을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는 억압(repression)이라고 한다.
프로이트에게 억압의 대상은 어떠한 장면, 혹은 그 장면이 나타난 순간이다. 위의 예에서 그 장면이란 교통사고나 재난의 장면 그 자체다. 프로이트는 이 장면을 가리켜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억압된 원초적 장면으로 부모의 성행위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을 든다. 갓 태어난 아기도 잘생긴 남성, 예쁜 여성을 알아본다는 연구 결과가 있듯 우리는 본능적으로 성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성을 상징화 체계화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한참이나 나이를 먹고 나서다.
아직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이가 그 장면을 목격하는 경우, 그 장면은 아이를 사고나 재난처럼 덮친다. 자신의 세계로 포섭될 수 없는 엄청난 장면을 아이의 무의식은 억압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성을 원초적 장면으로 하여 무의식에 의해 억압한된 사람은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며 성에 관련된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T. 비치의 카지노에서 무도회가 열린다. 19세의 소녀 롤 베 슈타인은 자신의 약혼자와 춤을 춘다.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도회장에 검은 옷을 입은 묘령의 미녀가 등장하며 상황이 바뀐다. 롤은 자신의 약혼자가 그녀에게 반했다는 것을 알았다. 약혼자는 미녀에게 춤을 청하고, 미녀도 춤을 수락하여 둘은 춤을 춘다. 첫 번째 춤이 끝나고 약혼자는 롤에게 돌아왔지만, 두 번째 춤이 끝났을 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롤을 한번 쳐다보지도 않고 검은 옷의 미녀와 함께 무도회장을 빠져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약혼자와 미녀가 무도회장에서 사라지는 순간 롤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한다. 그리고 그날부터 히스테리와 실어증을 앓기 시작한다.
예상했겠지만 이 장면은 더할 나위 없는 원초적 장면에 대한 은유다. 세상물정도 아직 잘 모르고, 자신의 세계에 오직 약혼자 한 사람만 있는 소녀가, 눈앞에 행복한 날만 남았을 것 같았던 순간에서 모든 것(약혼자)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에 대한 묘사다. (롤을 떠난 남자가 남편이 아니라 약혼자로 설정되어 있음에 주목하라)
롤의 비명과 졸도, 그리고 그 이후 겪는 히스테리와 실어증은 물론 억압에 대한 은유라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억압과 라캉의 억압은 다소 다르다. 라캉에게 억압이란 욕망의 유폐(幽閉)로, 일종의 명령이고, 일종의 금지다. 라캉에게 억압이란 대타자(大他者, Other)의 명령에 따라 욕망을 거세하여 실재계에 두고, 주체는 상징계에서 대타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좀 어려운 말일 것이다. 실은 이 부분이 라캉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내 경우는 상징계와 실재계, 대타자와 거세를 이해하는 데 몇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도 여러분 역시 라캉을 한 번에 이해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내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다만 쉬워지기 위해서 학문적 엄밀함은 다소 포기하도록 하겠다.
카푸어 컨텐츠를 본적 있는가? 자신의 수입에 맞지 않은 자동차를 산 누군가를 유튜버가 인터뷰를 한다. 유튜버는 인터뷰이의 용감함과 과감함을 칭찬하지만 그걸 보는 당신은 실은 그를 비웃고 있다. 도를 넘은 소비 후에 그가 겪을 고초와 몰락을 상상하며 고소해하는 한 편, 당신 자신은 그런 어리석은 소비를 하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이것이 계속 생산되는 카푸어 컨텐츠가 계속해서 소비되는 원리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자. 당신에게 좋은 차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는가? 만약 당신이 '월급이고 미래고 노후고 모르겠고 저 차를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 카푸어 컨텐츠를 클릭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관찰해 보면 당신에게도 어렴풋이 그 욕망이 있다. 실제로 실행에 옮겨보지 않았을 뿐, 당신 마음 한편에 있는 어떤 충동이, 어떤 욕망이 그 컨텐츠를 클릭하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지금까지 그 차를 사지 않았나? 무엇이 그것을 금지했나? 당신 스스로 구입을 금지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에게 구입을 금지시켰나? 그야 미래를 위해서, 그야 가정을 위해서, 그야 노후를 위해서... 인가?
라캉에 의하면 그 금지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사회적 명령이다. 친구와 싸우면 안 되고, 학교 복도에서 뛰면 안 되고, 오와 열에서 이탈하면 안 된다고 학교에서 배워왔던 이러한 명령들의 연장이다. 당신은 누군가에 의해서 계속해서 금지되어 왔다. 라캉은 이 금지하는 자를 바로 대타자라고 말한다.
당신도 실은 그 차를 갖고 싶었다. 당신에게도 그 욕망은 있었다. 평소의 당신이 그 욕망이 당신에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타자가 당신의 욕망을 당신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추방(거세)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유폐된 욕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카푸어 컨텐츠의 썸네일을 볼 때 어렴풋이 느낄 뿐이다. (거세된 욕망이 추방된 곳을 라캉은 실재계라고 말한다. 아래에 '응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이 내용이 다시 언급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욕망이 사라진 평범한 세계,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고. 다음 아침을 위해 과음하지 않고, 당신에게 허락된 조촐한 저녁과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잠드는 규칙적이고 평균적인 세계를 살아간다. 이렇게 당신에게 욕망과 충동이 제거된 평범한 세계, 당신이 대타자에게 복종하면서 복종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세계를 라캉은 상징계라고 부른다.
약혼자가 자신이 보는 자리에서 자신을 떠나는 것을 본 후 정신증을 앓기 시작한 롤은, 고향인 S. 탈라에 돌아온다. 롤은 밤거리를 정처 없이 걷는데, 그녀를 발견한 어떤 남자가 그녀를 위태롭게 생각하고 롤을 롤의 집에 까지 에스코트한다. 남자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롤에게 청혼하는데, 롤 역시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결혼 후 U. 브리지라는 도시로 가서 세 아이를 낳고 산다.
롤은 그들의 집에 규칙적인 질서를 부여한다.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물건들을 가지런히 놓고, 시간표를 만들어 그대로 행동했다. 방치했던 정원을 정돈하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나갔다. 롤은 마치 U. 브리지 모든 사람들의 삶을 합친 후 머리 숫자대로 나눠 놓은 것은 삶을 살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옛 약혼자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에 대한 비유인지 눈치챘는가? 롤은 약혼자의 기억을 거세했다. 그녀는 그녀의 원초적 장면을 억압하고, 무언가를 향한 욕망을 눈앞에서 치우고 금지하라는 대타자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롤은 당신이 일어나 출근하고, 일하다, 맥주 한 캔을 하고 잠드는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롤은 상징계의 질서에 자신의 몸과 생각을 맡겼다.
그렇다면 롤의 욕망은, 롤의 원초적 장면은 완전히 잊혀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카푸어 컨텐츠의 썸네일을 보는 순간 당신이 그 썸네일을 클릭하듯, 롤의 무의식이 억압하고 대타자가 추방한 그 원초적 장면과 무엇인가를 향한 욕망은, 언젠가 반드시 귀환할 것이다.
우리는 보는가? 이 또한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인가 싶은가?
라캉은 어느 날 어부의 배를 함께 타고 가까운 바다로 나아갔다. 문득 햇살에 부딪혀 반짝거리는 것이 라캉의 망막을 향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저게 뭘까? 바다 한가운데 저렇게 반짝이는 것이 있다니? 라캉은 넋을 잃고 빛나는 광점을 바라보았다.
배가 광점을 향해 다가가자, 라캉은 그것이 누군가 떨어뜨린 정어리 통조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통조림의 매끈한 어떤 부분이 햇빛을 반사시켜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라캉은 벼락같이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봄의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라캉은 이렇게 썼다. "나는 그 순간 정어리 통조림의 광점(光點)으로부터 보여지고 있었다."
잘 생각해 보라. 우리는 보는가? 대상이 있고, 우리는 주체로서 능동적으로 대상을 보는가? 이 시선은 과연 일방적인가? 잘 생각해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조금 잘생긴 남자가 지나가도, 예쁜 여자가 지나가도 순간 시선을 빼앗긴다. 바퀴벌레나 쥐처럼 기분 나쁜 것이 눈앞을 스쳐가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으로 그것들을 좇는다. 성적인 것, 건강이나 죽음에 관련된 것처럼 본능과 관련된 것들만 그러한 것 같은가? 기억을 떠올려 보시라. 지하철에서 앞사람 어깨너머로 그가 보고 있던 유튜브를 훔쳐보았던 적이 정말 없었는가?
우리는 이렇게 봄을 강요당한다. 우리는 주체로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 바라봄을 명령당한 결과로 그 대상을 바라본다. 이렇게 데카르트적 주체는 한번 더 붕괴한다. 라캉은 대상 쪽에서 주체를 향해 뻗어있는 시선을 응시(the Gaze)라고 한다.
응시는 시각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실은 내가 여기 쓴 것보다 훨씬 더 깊은 함의를 가지고 있지만, 이 글의 범위가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쓰고 줄이도록 하겠다.
다만 라캉은 단지 주체와 대상 사이의 시선 관계를 넘어,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실재계이다. 카푸어 컨텐츠 썸네일을 볼 때 발동하던 그 충동이 잠들어 있는 곳, 바로 우리가 거세하여 억압해 놓은 우리의 욕망이 실재계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떠올려 보자. 롤 베 슈타인이 거세해 실재계에 억압한 욕망은 무엇이었던가? 그렇다. 그것은 약혼자를 묘령의 여인에게 빼앗겼던 바로 그 기억이다.
이 책, <롤 베 스타인의 환희>에는 관찰자가 있다. 그런데 롤과 롤의 관찰자의 관계는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와의 관계와 많이 다르다. 전체적으로 묘사가 정밀하지 않고, 장면 장면이 잘 이어지지도 않으며, "아마 그랬을 것이다"며 추측이 등장하기도 한다.
10년 후, 롤은 가족들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다. 롤은 우연히 길에서 어떤 커플을 만나게 되는데, 롤은 그들이 여학교 시절 친구였던 타티아나 칼과, 그녀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롤은 한껏 멋을 낸 후 타티아나의 집으로 찾아간다. 타티아나와 함께 있었던 타티아나의 애인, 자크 홀드는 롤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자신이 이 이야기의 화자임을 밝힌다. 롤이 자크 홀드를 만나기 전 책 절반은 설정상 자크 홀드가 타티아나나 롤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를 적은 것이다. 그래서 묘사는 허술하고, 기억은 완전하지 않고, 추측이 등장하는 것이다.
자크 홀드는 한눈에 롤에게 반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쓴다. 그러니까 이 책 전체는, 자크 홀드가 롤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성립하지 않는 책이다. 롤이 자크 홀드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자크 홀드는 롤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녀를 관찰하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책을 구성하는 것이다. 즉 자크 홀드는 롤에게 '바라봄'을 당한 것이다. 여기에 첫 번째 응시의 구조가 있다.
자크 홀드는 롤에게 타티아나를 떠나 롤에게 가겠다고 말하지만 롤은 거절한다. 롤은 그에게 계속 타티아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타티아나와 자크 홀드가 만나는 호텔 뒤편 호밀밭에서 그들을 기다린다. 호밀밭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아는 자크 홀드는 그녀에게 '보여지기 위해' 타티아나와 창문 앞에서 섹스한다. 호밀밭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타티아나에게는 롤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어두운 호밀 밭의 롤을 자크 홀드 역시 시각적으로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크 홀드는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실재계의 '응시'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억압의 개념에 대해 프로이트와 라캉이 차이를 보인다고 썼는데, 프로이트 학파와 라캉 학파는 정신분석 요법적 측면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 내용을 소개하려면 한 바닥 글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고, 간단하게만 소개해 보겠다.
위에서 프로이트 정신분석 이론에서 억압의 대상은 원초적 장면이라고 했다. 자신이 경험한 사고나 재난이 억압의 대상이다. 그런데 라캉은 다르다. 라캉은 억압의 대상은 기억이 아니라 기표(記表, signifiant, 시니피앙)이라고 말한다. 기표와 기의(記意, signifié, 시니피에)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이 글에서 중요한 주제가 아니므로 그냥 쉽게 언어로서의 '단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겠다. 즉 라캉 학파의 정신분석에서, 정신분석 혹은 정신분석가의 목표는 분석주체(환자)가 억압한 '단어'를 찾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라캉학파 정신분석에서, 의식화하지 못하는 기표를 찾아내기 위해 분석가는 자유연상기법을 사용한다. 억압된 기표는 그것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연상기법은 분석주체가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마구 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어지지도 않고, 맥락도 없으며, 꼭 그전 이야기와 앞뒤가 맞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자유연상을 통해 진행하던 이야기가 뚝하고 멈추는 순간이 온다. 그때 분석가는 바로 그 억압된 것 근처에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야기가 멈춘 것은 무의식이 더 이상의 자유연상 진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억압된 것의 정체를 드러낼 준비가 된 것이다.
억압된 기표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분석주체가 너무 말을 술술 잘한다고 판단하면 분석가는 말을 자른다. 특히 '새롭게 등장한 기표'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분석주체가 "그날은 유난히 더웠는데, 출근길에 있는 공사장에서 나는 온갖 소음 때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습니다. 드릴 소리, 포크레인 소리, 인부들이 잡담하는 소리..." 그 순간 분석가는 말을 자른다. "방금 '인부'라고 하셨습니까?" 이렇게. "인부에 대해 말씀해 보시죠."
분석주체는 말을 이어가지 못하다, 망설이며 이렇게 말한다. "그 공사 노동자들은..." 분석가는 다시 말을 자른다. "아니오, 인부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다시 분석주체는 말을 잇지 못한다. 분석가는 드디어 이 기표가 억압된 기표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라캉은 정신분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에 등장하는 실제 사례로, 실제 억압된 기표는 '인부'와 유사한 '임부(임신한 여자)'이다)
롤은 자크 홀드와 함께 무도회장이 있었던 T. 비치에 간다. 밝은 햇볕이 빛나는 해변에서 롤은 한껏 들떠 있다. 그녀는 자크 홀드를 데리고 카지노에 들어선다. 낮 시간대라 카지노는 닫혀있고, 시큐리티 가드가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무도회장을 찾는다는 그들에게 가드는 카지노에 무도회장이 두 개 있다며, 혹시 무도회장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롤이 대답한다.
"라포티니에르."
이 책, <롤 베 스타인의 환희>에 등장하는 모든 시간과 장소는 익명으로 되어 있다. T 비치, S 탈라, U 브리지. 이러한 공간이 어디에 있는지 작가는 밝히지 않는다. 또한 이들이 어느 국가에 살고 있는지 조차 독자들은 짐작할 수 없다. 롤의 아버지가 아마도 독일계였을 거라는 것 정도만 그녀의 성(스타인, Stein)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다. 롤의 19세 무도회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 작품 안의 그 어떤 시간도 현실적인 달력의 어디에 위치하는지 독자들은 알 수 없다. 시대를 짐작할 수 있는 장치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무도회, 정원, 산책, 카지노, 살롱 같은 것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등장인물의 이름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익명인 작품 속에 단 한 개의 고유명사가 이 장면에서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이 것이다. "라포티니에르 (La Potinière)". 바로 예전 약혼자와 묘령이 여인이 자신 앞에서 자신을 떠났던 바로 그 무도회장의 이름이다.
눈치를 챘는가? 그렇다. 이것이 롤의 무의식이 실재계에서 억압하고 있는 단 한 개의 기표인 것이다. 분석주체로서 롤은 이 순간 스스로 자신이 억압한 기표에 도달한 것이다.
롤과 자크 홀드는 무도회장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해변에 있는 식당을 찾는다. 롤은 극심한 허기를 느끼고 음식물을 섭취한다.
음식을 먹고, 하룻밤을 지내고 나서 자크 홀드는 롤에게 그녀를 떠났던 약혼자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한다. 롤은 정신증이 완전히 나은 것처럼 술술 그녀의 옛 약혼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자크 홀드는 잠자코 듣는다. 억압된 기표로부터 해방된 롤은 이제 약혼자를 눈앞에서 잃은 사건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롤이 호밀밭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리고 나의 길었던 줄거리 요약도 이제 끝났다.
어떠셨는지, 과연 '소설로 쓰인 라캉'이라고 할만했는가?
아마 이 엄청나게 긴 글을 다 읽은 분은 정말 몇 분 되지 않을 것이다. 뒤라스를 사랑하는 민정님과, 그런 민정님을 사랑하는 세은님 정도. 그리고 호기심 많은 상율님과 약간 활자 중독 증상이 보이는 우상님 정도가 아닐지.
사실 이 얘기 말고도, 기의에 닿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기표 때문에 불가능한 대화라던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구도 같은 라캉의 다른 이론들도 가져와 할 수 있는 얘기가 많았는데, 이미 엄청난 분량이라서 이만 마쳐야 하겠다. 언젠가 멤버들과 오프라인에서라도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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