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과 정신의학>, 브루스 핑크
지난 주말에 브루스 핑크의 <라캉과 정신의학>을 다 읽었다. 브루스 핑크는 영미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라캉학파 정신분석가다.
사실 영미권에서 정신분석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다. GTA V는 주인공인 마이클 드 산타가 정신분석가에게 상담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게임 내내 마이클은 정신분석을 받는데, 정신분석을 통해 마이클의 생각이나 행동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이클은 정신분석가에게 많은 돈을 지불한다. 영미권에서 정신분석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정신분석 불모지에서 정신분석의 위상을 바꾼, 혹은 바꿔나가고 있는 이들이 브루스 핑크와 슬라보예 지젝이다.
지젝은 역사적 사건이나 영화처럼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욕망을 정신분석한다. 2003년 UN 총회에서 파월 국방의장이 이라크 공습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뒤 벽면에 걸려 있던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가려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지젝은 이 장면을 라캉의 '억압'과 연결한다. <게르니카>를 가려달라는 요청이 오히려 이라크 공습이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공습과 같은 무자비한 것임을 드러낸다는 것이 지젝의 설명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공습의 파국적 결과를 형상화한 피카소의 작품이다.)
브루스 핑크는 라캉의 텍스트를 번역하는 한 편, <라캉의 주체>, 그리고 이 책 <라캉과 정신분석> 등을 통해 라캉의 이론을 영미권에 소개한다. 그중 <라캉과 정신분석>은 임상의 원칙으로 자리 잡은 라캉의 명제들을 중심으로 정신분석의 구체적인 방법과 원리를 서술하는 책이다. 분석의 출발점부터 진단과 분석가의 위치, 그리고 분석의 종료까지 친절히 설명한다. 철학으로서 라캉의 이론들을 접한 이들에게 라캉이 상정했던 많은 정신분석 이론들이 정신병의 진단과 증상의 관해를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숀 호머의 <라캉 읽기> 등 라캉 입문서 몇 권 정도를 읽은 이들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권한다. 라캉의 삼계, 대상 a, 대타자와 법 등 라캉의 철학소들이 단지 형이상학적 철학소에 그치지 않고, 인간 정신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출현해야 하는 개념들임을 깨달을 수 있다. 라캉은 전혀 뜬 구름 잡는 형이상학자가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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