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그린, 하이데거, 미셸 푸코가 만나는 지점
아는 만큼 읽힌다고, 브라이언 그린을 읽다가 하이데거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브라이언 그린이 사회심리학자 어니스트 베터의 사회 실험을 하나 소개하고 있다. 판사들을 모아 놓고 한 그룹에게는 평범한 질문(당신의 성격을 설명해 주세요)을 하고, 한 그룹에게는 죽음에 대한 질문(죽음을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됩니까?)을 한다. 그러고 나서 간단한 경범죄를 저지른 피고인들에게 형량을 책정해 달라고 하면 죽음에 대해 고려한 그룹이 9배나 높은 형량을 책정한다는 것이다. 베커는 국가와 성별, 죽음을 떠올리는 방법 등을 바꾸어가며 이 실험을 수백 번 진행했는데, 결과는 늘 같았다고 한다.
이 실험은 '죽음을 고려한 이는 더 엄격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실험을 베커는 이렇게 해석한다. '인류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고. 죽음을 떠올릴 때 느끼는 무력감을 피하려는 방식으로 문화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하이데거의 통찰과도 일치한다. 잘 관찰해 보면 우리는 평소에 마치 우리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퇴근하여 TV 앞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시고 잠드는 우리의 일상에는 죽음이 없다. 우리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라도 보는 것은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들 때 정도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가리켜 잡담, 호기심, 애매성에 빠져 퇴락하여 세인이 된다고 표현한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죽음을 망각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잡담, 호기심, 애매성으로 채워진 우리의 일상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죽음을 망각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죽음에게서 도망치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죽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이데거는 죽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진 사회적인 모든 것은 무력해진다. 나는 내가 가진 사회적 지위나 부, 내가 이룬 것들이나 내가 가진 지식으로 죽음에 맞설 수 없다. 아무것으로도 죽음과 맞설 수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하이데거의 철학이 시작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같은 지적을 미셸 푸코도 한다. 묘지는 어떠한 공간인가? 묘지는 우리가 일상에서 유일하게 죽음과 직면하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묘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고려하는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묘지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유족들을 위로할 뿐이다. 묘지에서도 죽음은 우리에게 속해있지 않다. 묘지의 죽음은 타자에게 속해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푸코는 일상에 위치한 이러한 비일상적 공간들을 헤테로토피아라고 한다)
한편 브라이언 그린은 그의 특유의 유머를 덧붙이며 이 단락을 끝낸다. 베커의 실험 결과는 당신에게 어떻게 들렸는가? 죽음을 고려하면 형량이 올라간다는 실험 말이다. "웃기고 있네",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가? 브라이언 그린은 만약 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문화'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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