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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Jan 06. 2024

<비극의 탄생>은 어떻게 고전으로 남았는가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박찬국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완독. 주말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후기를 남긴다.


이 책은 서울대 박찬국 교수님이 쓰신 니체의 <비극의 탄생> 해설서인데, 오늘 독후감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쓸 생각이다. 개인적인 소회나 책 내용의 요약 보다는, 왜 <비극의 탄생>이 고전으로서 의미 있는지, 니체는 이 책을 왜 쓰게 되었는지, 혹은 무엇을 비판하고 반박하기 위함이었는지 쓸 계획이다. 이 책은 이번 #트레바리 모임 주제책인데, 니체가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클럽 멤버들에게 참고 자료로 제공할 목적으로 쓰고 있다. (따라서 다소 엄밀하지 않을 예정이다)


<비극의 탄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칸트의 <판단력 비판>과 더불어 세계 3대 예술철학서로 꼽힌다. 예술철학은 예술을 철학의 대상으로 하는 철학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는 철학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아름다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주목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놀기 좋아하는, 명랑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유튜브도 LOL도 없었으니 놀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규칙을 만들어 스포츠를 즐겼다. (아시다시피 올림픽의 기원이 이러하다) 또 다른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를 지어냈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문학적 위상을 생각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상상력과 예술적 능력들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술 문화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비극’ 공연이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은 셰익스피어 이후의 비극들과 다르게 일종의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비극은 반원형의 극장에서 시연되었는데, 무대는 가장 낮은 쪽에 있고, 관객석은 끝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비극 시인이 무대에 올라와 서사시를 암송하고, 관객석에 있는 코러스(합창단)이 때로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역할도 하며 극이 진행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다. 그리스 비극은 그저 공연으로 끝나지 않고 정기적으로 경연대회도 열렸다고 하니, 우리 시대로 따지면 <브리튼스 갓 탤런트>나 <싱어게인> 같은 컨텐츠였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비극의 탄생>을 쓰던 당시, 니체는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였다. 고전문헌학은 과거의 문서와 책들을 분석해서 복원하는 학문이다. 20세기 최고의 고전문헌학자로 꼽히는 루돌프 파이퍼는 "고전문헌학이란 과거의 한 문헌이 최초의 원전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에게 왔는지 해명하고, 그 전승 과정 중 생겨난 오류를 교정하여 최초의 원전을 복원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고전문헌학은 문헌의 해석에는 관심이 없다. 고전문헌학의 목표는 오로지 복원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어색해보이는 이러한 학문이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은 중요한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이 위대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버터필드는 <근대 과학의 기원>에서 서구 세계를 근대로 이행한 사건은 종교개혁이나 르네상스가 아니고 과학혁명이라고 말한다. 17세기는 과학혁명의 시대였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간하며 시작된 서구 과학혁명은, 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하며 만개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자아'를 상정한 것도 1637년이다. 


우리는 과학과 철학을 전혀 다른 학문으로 받아들이지만, 불과 4백년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과학은 17세기에 와서야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다. 그리고  등장하자 마자 과학은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력한 방법론이 되었다. 천체의 움직임이 재현되는 것을 수학적으로 예측해내는 것은 당시엔 엄청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재현’은 그래서 17세기 서구 문명에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천체의 운동 처럼, 무엇이든 재현되는 것은 과학이 됐다. 그리고 오히려 과학이 아닌 것은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떡잎이 하나인 식물의 모든 종은 그 후손에서 떡잎이 하나임이 반드시 ‘재현’된다. 그 식물은 외떡잎 식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과학이 되었다. 물이 100도에서 끓고 0도에서는 언다는 사실은 늘 재현된다. 100도와 0도는 역시 이름을 부여받고 과학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과 17세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과학은 다소 달랐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칸트의 작업,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모든 과정은 형이상학을 과학적 방법론으로 다루기 위한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위대한 칸트 조차도 시대의 요구를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못했던 것이다. (‘재현’의 최초 후퇴는 칸트로부터 비롯하지만, 이 문서의 범위는 아니니 일단 여기까지) 


어쨌든 그래서 우리에게 다소 낯선 고전문헌학이라는 학문이 당시에는 크게 유행할 수 있었다. 앞서 고전문헌학의 키워드는 ‘복원‘이었다고 얘기했다. 즉 고전문헌학은 먼 과거의 문서를 현재에 ’재현‘하는 과학이었던 것이다. 당시 고전문헌학자들은, 당시에 과학적 방법론을 받아들였던 모든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엄밀하고 치밀하게 고대의 문서의 자구(字句)들을 분석하고, 현대의 언어와 비교하고, 옮기고, 주석을 달았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러한 고전문헌학 전체의 전복을 시도한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이 그저 고대의 문서를 현대에 ‘재현’해내는데 그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가져와 시대를 비판하고, 새로운 인간론을 설파한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이 이성적인 것, 스토리적인 것, 형식적인 것(니체는 이것을 아폴론적인 것이라 부른다)과, 감성적인 것, 음악적인 것, 도취적인 것(니체는 이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부른다)의 균형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언뜻 이 구도는 납득이 될 것이다. 음악이 삭제된 뮤지컬이나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연극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데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몰락이 아폴론적인 것(이성적인 것)이 강조되고 디오니소스적인 것(감성적인 것)이 억제되며 시작되었다고 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아는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장면을 말하는데, 이 때 신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후기 그리스 비극은 주인공이 파멸하며 겪는 격정적 감정의 폭풍을 표현하지 않는다. 니체는 이 지점을 지적한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몰락의 주범으로 소크라테스를 지목한다.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는 “아름답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지적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성적인 것을 강조하고 감성적인 것을 등한시하는 소크라테스주의를 고대 그리스 비극이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리스 비극은 몰락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비극의 탄생>은 스위스 바젤 대학 어느 젊은 교수의 뇌피셜, 혹은 발칙한 의견 정도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니체는 19세기의 유럽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생각해보라, 여러분들의 세계는 고대 그리스 후기 비극과 다른가?“


니체는 고전문헌학 전체와, 자연에 이름을 붙이는 과학에 반기를 든다. 여러분이 굳게 믿고 있는, ‘재현되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과학주의는 여러분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가? 정말 그러한 지성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하고 말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가 고대 그리스와 함께 소멸한 것이 아니라, 니체가 살던 시대에 등장한 낙관적 과학주의, 민주주의, 공리주의 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논리적 지성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적 낙천주의를, 근대 계몽주의가 계승하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계몽주의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연재해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의 실현을 통해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 다시 말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리주의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니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이성적인 것들에 너무 큰 기대를 건 그리스 비극이 몰락한 것처럼, 니체 시대의 과학적 낙관주의는 인간의 소외와 염세주의적 세계의 도래를 가져올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이성이 지배하는 삶, 과학을 신앙화하는 삶, 본능을 부정하는 삶은 니체가 보기엔 병적인 삶이었다. 


이렇게 니체는 생생한 삶과 세계에 등돌리고 고전의 자구만 파고드는 고전문헌학과 이성중심주적 서구 사회 전체에 반기를 든다. 출간 당시 <비극의 탄생>을 향해 쏟아진 비난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책을 쓴 사람은 누구든지간에 학자로서는 끝장이 난 셈이다"는 식의 혹평이 당시 고전문헌학계의 중론이었다. 니체의 스승이었던 알브레이트 리츨 조차 이 책을 "흥에 겨운 술주정" 정도로 평가하며 실망을 금하지 않았다. 니체의 명성은 당시에 바닥까지 추락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포스트모던이 대표하는 현대철학에서 그놈의 '이성'은 조롱거리가 된지 오래되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가 증명되었던' 자아 같은 것은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이후 박살이 났다. 과학의 신화는 토머스 쿤 이후 산산조각이 났고, 우리는 과학의 수혜를 받지만, 과학을 종교화 하지는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아무도 '재현'을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이 <비극의 탄생>의 위대한 부분이다. 니체는 이성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 과학이 재현을 통해 종교화되던 시대의 한복판에서 시대를 향해 반기를 든 것이다. 객관과 주관의 구별은 큰 의미가 없고, 주체와 대상의 이원론도 허구적인 것이며, 몸과 본능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이성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니체의 사상은 니체 이후의 데리다, 들뢰즈, 푸코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 


아무도 바라보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으로, 고전의 자구 해석에 머물러 있던 고전문헌학과, 계몽주의와 낙관적 이성 중심주의에 젖어 있던 서구 문명에게 호통을 친다. 그 시대의 시대 정신을 가진 책이었기에 <비극의 탄생>은 오늘날에도 읽히는 고전으로 남은 것이다. 


이렇게 길게 썼지만 사실 이 글 안에서 <비극의 탄생>에 담긴 내용은 몇 줄 쓰지도 못했다. <비극의 탄생>에 대한 글은 언젠가 <비극의 탄생> 1차 저작 독후감으로 다시 써 보겠다.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는 박찬국 교수님이 <비극의 탄생>을 소재로 삶의 고독과 예술적 위로에 대해 말씀하시는 책인데, 역시나 교수님 답게 편하고 쉽게 읽히는 필치로 쓰여져 있다. 늘 그렇듯 따뜻한 위로를 건네시는 분이라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훈훈했다. 삶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책에서 작은 위로를 찾으시기를 권한다. 


긴 독후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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