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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Sep 25. 2023

어떤 약속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실화다

1981년, 일본. 모리라고 하는 덩치 큰 야구 소년이 있었다. 전국급 유망주였던 그는 야구 보다 그림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같은 반에 키도 작고 조용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늘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흥미를 갖고 있었던 모리는 금방 그 친구와 친해졌다. 친구의 이름은 미우라였다. 


복싱과 가라데 유단자인데다 취미가 오토바이인 과격한 모리와는 달리 미우라는 내성적이고 조용했다. 미우라는 평소엔 별로 말이 없었지만, 자기가 그리고 싶어하는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을 빛냈다. 만화 이야기를 할 때 만은 모리는 조용히 미우라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미우라는 캐릭터가 선명하고, 어둡고 강렬한 판타지 만화를 그리고 싶어했다.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이야기였다. 캐릭터 한 명 한 명의 개성이 너무나 뚜렷하고, 그 깊이가 아주 깊었다. 이야기는 오랫동안 미우라의 안에서 가공되고 조각됐다. 모리는 때로 미우라의 이야기에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함께 정리를 도와주기도 했다. 


모리와 미우라는 둘 다 만화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들은 그림을 더 공부하기 위해 함께 일본대학 예술학부에 지원했다. 운이 좋았는지 둘 다 학교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3년을 붙어 다닌 두 친구는 대학 생활도 함께했다. 


미우라가 그리기를 희망했던 다크 판타지는 대학시절 밑그림이 완전히 완성되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가 전부 설계되었다. 즉흥적이었던 모리와는 달리 미우라는 장인에 가까왔다. 미우라는 세계관 부터 캐릭터까지, 시작부터 엔딩까지 모든 플롯의 세밀한 세부 사항까지 모두 결정했다. 모리는 고등학교 때 처럼 마지막까지 미우라의 밑그림 작업을 도왔다. 


마침내 스물 두 살 때, 미우라는 단편 <베르세르크>를 만화 잡지에 투고했고, 당선되었다. 신인으로 등단한 미우라는 드디어 다크 판타지 <베르세르크>의 연재를 시작했다. 


한 편, 모리는 만화가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미우라를 따라 여러 만화를 여러 공모전에 투고했지만 번번히 낙선했다. 실망한 모리는 술에 빠졌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싸움도 잦았다. 누군가 시비를 걸면 덩치도 크고 다혈질인 모리는 참지 않았다. 늘 얼굴이 누군가에게 맞아서 터진 상태였다. 어느 순간 모리는 그림을 놓아 버렸다. 


인기 만화가가 된 미우라에게는 새로운 원고에 대한 요청이 잦았다. 하지만 미우라는 모든 요청을 거절하고 오직 <베르세르크> 하나에만 매달렸다. 하나만 그리고 싶어했다기 보다, 완성한 이야기가 <베르세르크> 하나 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크린톤을 거의 쓰지 않고 모든 장면을 세필화 처럼 그려나가는 미우라의 작업 방식은 엄청난 시간을 소모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10시간씩 작업에 매달렸다. 어시스턴트들이 버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잦았다. 팬들과 편집자가 미우라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로 미우라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미우라와 모리의 관계는 조금 소원해졌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20대 후반이 된 둘이 오랜만에 만났을 때, 모리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장난기 있고 쾌활했던 모리는 없고, 어둡고 낙담한 청년이 거기 있었다. 미우라는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지 않았다. 미우라는 <베르세르크>의 뒷 부분을 조금 수정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모리는 그 이야기를 또 묵묵히 들었다. 


미우라가 이야기를 마치자, 모리는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그릴 이야기가 더 없다고 했다. 미우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미우라는 낙담하고 실망했던 시절,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싸움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써 보라고 모리에게 권했다. 미우라의 조언에 용기를 얻은 모리는 정말 오랜만에 다시 펜을 들었다. 


모리가 그려낸 이야기는 처절했다. 링 위에서라면 절대 사용할 수 없는 반칙이 길거리 싸움에서는 흔하게 오간다. 링 위에는 없는 벽, 장애물, 아스팔트 바닥, 빛과 어둠이 길거리에서는 싸움의 요소가 된다. 모리는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알기 힘든 길거리 싸움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모리의 작품 <홀리랜드>는 세계적인 히트작이 됐다. <홀리랜드>는 2005년 일본에서, 2012년 한국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동갑내기 고등학생 친구 둘은 꿈 꾸던 대로 둘 다 만화가로서 성공했다. 





한 편, 미우라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베르세르크>는 일본을 대표하는 대작의 반열에 끼었지만 미우라는 자주 연재를 쉬었다. 모리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지만 미우라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미우라는 <베르세르크>를 그리는 것 말고는 삶의 목표가 없는 것 같았다. 엄청난 인기와 부를 가졌지만 미우라는 늘 작업실에서 <베르세르크>를 그렸다. 


50대에 들어서면서, 미우라는 자신이 생전에 <베르세르크>를 완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야기는 완결까지 모두 결정되어 있지만 자신의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미우라는 오랜만에 모리를 만났다. 미우라가 말했다. '베르세르크의 스토리 마지막 부분은 모리, 너에게 밖에 얘기하지 않았어' 모리는 미우라가 어떤 부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리는 미우라에게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었다. 


미우라는 <베르세르크>를 마치지 못하고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미우라의 데뷔작이자 대작인 <베르세르크>는 유작으로 남겨졌다. 만화계 인사들과 전세계의 팬들이 그를 애도했다. (나 또한 그 때 글을 하나 남겼었다. 아래에 그 글을 링크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그간 모리는 <베르세르크>가 미완으로 남는 것에 대해 고민을 거듭했다. <베르세르크>는 미완이었으나, 모리는 그 이야기를 통째로 다 알고 있다.  '베르세르크의 스토리 마지막 부분은 모리, 너에게 밖에 얘기하지 않았다'는 미우라의 말이 어떤 뜻인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리는 스스로 <베르세르크>를 그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모리는 친구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미우라를 존경했고, 그런 모리는 <베르세르크>는 미우라이기에 그릴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독자들을 위해 인터뷰 등을 통해 이야기를 공개할 것인가? 그게 미우라가 바라는 바였을까?


그러던 어느 날 미우라의 어시스턴트들이 모리를 찾았다. 그들은 <베르세르크>의 새 원고를 들고 있었다. 모리는 크게 기대하지 않으며 원고를 펼쳐보다 눈물을 쏟았다. 거기엔 <베르세르크>의 완성 원고가 있었다. 모리는 '때로 필사적인 힘은 기적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어시스턴트들은 진심이었다. <베르세르크>를 그리겠다고 모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침내 모리는 <베르세르크>의 재 연재 감수를 맡기로 했다. 수십년 동안 미우라를 도와 그림을 그려왔던 스탭들과 함께, 40년 동안 미우라에게 들어왔던 이야기를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2022년 6월, 영 애니멀 최신호에 드디어 <베르세르크> 연재 재개 소식이 올라왔다. 그리고 이 믿기 어려운 놀라운 이야기는 실화다. (약간의 각색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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