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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Sep 26. 2023

돈의 죽음

우리 시대의 초인이 일어서는 법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트레바리 클럽 멤버 박세은님이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고 쓴 독후감에 덧글을 달다… 문득 내 포스팅거리로도 적절한 것 같아 본인의 허락을 받아 이 곳에 새로 옮겨 적어 본다. 점심시간이 통째로 다 들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오랜만에 쓰는 정성글이 될 것 같다. 


니체, 하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경구가 있다. 바로 “신은 죽었다”이다. 이 경구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만 실은 이 경구의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니체는 왜 신이 죽었다고 할까? 신이 죽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이런 밑밥을 까는 이유는,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이 글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읽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밑에 나오니 조금만 따라오시기를. (최대한 쉽게 쓸 테니까 어려울 것 같다는 걱정은 안하셔도 된다)


우선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좋음과 나쁨, 그리고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명품 핸드백과 고급 스포츠카는 좋은 것에는 해당하지만, 선한 것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등장 이전엔 좋음과 나쁨의 구분만 있었다. 예를 들어 노예의 식사는 형편없는(나쁜)것이었고, 노예의 주인의 식사는 훌륭한(좋은) 것이었다. 노예의 굴종과 주인의 지배는 신분의 차에서 발생한 것으로, 여기엔 선과 악의 구분은 없었다. 주인은 진취적으로, 확실성을 갖고, 결단하며, 창조적으로 행동했고, 노예는 겸손하게, 근면하게, 친절하게, 순종하며 행동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등장 이후 이 구분법은 바뀌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 순간 강자의(주인의) 도덕은 천국에 갈 수 없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반대로 그리스도교는 주인에게 억눌린 원한과 죄의식을 도덕의 본질로 바꾸었다. 즉 그리스도교는 약자(노예)들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금욕적이고, 겸손하고, 희생하는 선한 너희들는 천국에 갈 것이고, 진취적이고, 지배적이며, 결단하고, 창조하는 악한 주인은 지옥에 갈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했다. 니쳬가 보기에 선악은 실존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도입한 개념이다. 



니체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19세기 유럽인들이 병들어 있다고 진단한다. 그 병의 이름은 나약함과 왜소함이고, 이 병의 직접적인 요인을 그리스도교라고 진단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썼다. 



특히 그들 중 <복종을 가르치는 자>들이 그렇게 외쳐.
나는 바로 그들의 귓구멍에 대고 이렇게 고함 지르고 싶어.
'그래! 내가 바로 신을 안 믿는 차라투스트라야!'

(중략)

너희가 믿는 <복종의 가르침>은 '주어진 것'을 따르라고 하지.
하지만 내가 정확하게 말해 주지. 너희, 안락한 사람들!
'주어진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야.
앞으로 너희는 더 많이 빼앗길 거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본문에 나와 있는 <복종을 가르치려는 자들>은 그리스도교 그 자체이고, <복종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이다. 니체의 이 본문에서 니체는 진취성, 결단력, 창조력을 ‘빼앗기’고도 겸손, 근면, 순종 등 ‘주어진’ 것을 순순히 따르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너희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빼앗긴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길 것이라고. 


니체는 '좋은 것'을 모두 빼앗기고, 그리고 앞으로도 빼앗길거면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교의 노예들 앞에서, 그래서 신의 죽음을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너희들에게 노예의 도덕을 속삭였던 그 종교는 사라졌다. 너희들의 것을 주인이 빼앗아 가는 것을 정당화했던 그 교리는 사라졌다. 니체는 억압된 현실 세계를 해방하려고 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방될 수 있는? 니체는 우리는 초인(위버멘쉬)이 됨으로서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서 자기 자신을 극복한 존재다. (이 지점에서 약간 허탈한 느낌이 드는 거 안다. 조금만 더 따라오면 된다. 곧 재밌어진다)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니체의 철학적 언어를 보다 쉽게 쓰면, 니체의 초인은 스스로의 가치관을 창조해가는 사람이다. 새로운 가치관의 창조는 받아들인 가치관을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묻는 것이다. “왜 학생은 학교에 가야 하는가?”, “왜 학생은 수업 시간에는 수업을 들어야 하는가?”, “왜 숙제는 꼭 해와야 하는가?”, “왜 시험을 치러야 하는가?” 


질문이 이상해 보이는가?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허락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 어색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상한 점이 많다. 수업 시간에 수업을 듣고 싶은 학생만 들으면 안될까? 학교에 가기 싫은 날, 그냥 안가고 친구들과 놀러 가면 세상이 바뀌는가? 공부를 하는 목적은 시험을 보는 것인가? (시험 끝나고 한달만 지나면 내용을 다 까먹을 그 시험 말이다) 


그러다 보면 학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는 지식의 교육기관이 아니구나.", "학교의 본질은 복종을 가르치는 곳이구나", "학교의 구조는 감옥의 구조와 비슷하구나", 하고 말이다. (예를 든 것이고, 이 생각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에게서 가져왔다) 


혹은 이러한 질문들을 거치고 나서 결국 “학생은 학교에 가는 것이 맞다”는 원래의 결론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니체는 이를 가리켜 ‘고상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초인과 노예는 다르다. 초인은 스스로 그 가치관을 창조해냈고, 노예는 누군가가 창조해 낸 가치관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다. (초인에 대해 재미있게 쓰기 위해 고의적 곡해를 했다는 것을 니체를 잘 아는 분은 보일 것이지만) 


자, 자신의 가치관을 스스로 창조해 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은 마음에 드는가? 신이 사라진 허무주의의 시대를 극복하는 태도로 이 정도는 충분한가? 


사실 여기까지 읽고 다면 다소 허탈함을 느끼는 것이 보통일 것이라 고 생각한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가? 현실을 돌아보면 나는 오늘도 회사에 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며, 나에게 허락된 시간은 저녁 나절 몇 시간 뿐이다. 맥주 한잔 하고 잠드는 것도 모자란 시간에, 내가 스스로 나의 가치관을 창조한다는 것이 나의 인생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는가? 나는 초인이 될 수 있는가? 이것 역시 옛 철학자의 또 다른 공허한 선동일 뿐이 아닐까? 


더군다나 현실적으로 사회적으로는 약자들이 있다. 현대 경쟁사회에서 낙오하거나 패배한 이들에게, 바꿔 말하면 “너 자신을 찾으라”는 말과 다름 없는 니체의 웅변은, 과나의 <나만 찌질한 인간인가봐> 같은 독백 혹은 조롱이나 불러오지 않을까? (내 표현 보다는 훨씬 고급스럽고 깊지만, 박세은님의 독후감도 이러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니체의 예언대로 신은 죽었다. 물론 그리스도교는 현대에도 위세를 떨치는 세계적 종교지만, 삶의 중심에 신앙이 있는 현대인은 드물다. 현대인의 삶은 중세나 근대보다 훨씬 세속적이며, 복잡하고, 다양하다. 만약 오늘 니체가 강남대로 한복판에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면 “누가 죽었다구요?” 정도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거기에서 끝이 아니다. 니체는 자신이 신을 죽이면, 우리가 모두 초인이 될 줄 알았지만, 니체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다. 신이 죽자 우리는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바로 자본주의다. 


그리고 이 자본주의는 그리스도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배척할 수 많은 이교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다. 유일한 이교도였던 공산주의는 스스로 붕괴했다. 이제 현대인 중 자본을 떠나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 신이 바뀌었다면 이제 노예의 도덕도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교 시대엔 겸양, 순종, 검소, 겸손 같은 것들이 노예의 도덕이었다면, 현재의 노예 도덕은 부자에 대한 질투, 부자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 거라는 믿음, 못 가진자에 대한 경멸, 내가 못가졌음에 대한 불안, 돈 버는 방법에 대한 탐구, 다른 이들이 가진것과 내가 가진것을 비교, 같은 것들이다. 니체의 시대에는 주일에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고백했지만, 현대에는 경제적 자유 모임에서 자기개발서를 읽으며 신앙을 고백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가? 그리스도교 도덕과 자본주의 신앙이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이.   


그래서 니체의 초인이 신의 죽음 위에서 일어서듯, 우리 시대의 초인은 돈의 죽음 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돈을 초월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서 늘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번다는 것은 숨을 쉬는 것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초인은 어떻게 일어서는가? 


니체의 초인은 질문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극복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초인도 질문을 하면서 일어선다. “나는 왜 돈을 버는가?”, “나는 왜 회사에 가는가?”, “나는 얼마만큼의 돈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그 정도의 돈을 벌면 행복해 질 것인가?"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교수는 서울대학교 졸업생들에게 한 축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 변덕스러운 우연이, 지쳐버린 타인이,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에게 모질게 굴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기 바랍니다. 나는 커서 어떻게 살까, 오래된 질문을 오늘부터의 매일이 대답해줍니다.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허준이 교수의 서울대학교 졸업생 축사 中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내가 보내는 하루 하루가 대답으로 쌓일 것이다. 그 마지막에서 비로소 나를 오래 기다렸던 나를 만나게 되었을 때, 부디 그 때 아쉬움이 없기를. 허준이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병원 휠체어에 앉아 나를 오래 기다렸던 나를 만났을 때, 나는 나에게 어떤 말을 들을 것인가? 당신은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즐겁게 지냈었구나. 아쉬움은 없겠다", 

"많이 사랑했구나, 좋았겠다",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했었구나, 그들도 고마워할거다" 


같은 말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가? 


그럼 이 말은 어떤가? 


"돈을 많이 벌었구나, 수고했다" 


방금 뭔가 철렁한 느낌이 들었다면, 당신은 초인이 되기 위한 첫 발을 딛은 것이다. 허준이 교수의 졸업식 축사는 매우 니체적이다. 니체 시대의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교의 노예라는 것을 몰랐듯, 우리는 우리가 돈의 노예라는 것을 잘 모른다. 돈은 공기처럼 자연스럽기에, 돈을 번다는 행위는 호흡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필사적인 것도, 좋은 이직 자리가 없나 알아보는 것도, 이번에 임원이 된 동기를 질투하는 것도, 실은 돈을 번다는 자연스러운 목표가 야기한 것이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노예로 남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 돈을 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추구하는, 돈이 아닌 가치관을 창조해내는 것으로 초인이 되어야 한다. 돈 보다 중요한 목적(목표 아님 주의)이 인생에 있어야 한다. 니체가 신을 살해했듯, 우리는 돈을 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회사를 다니거나 사업을 하는 분들은 물론, 멋진 몸을 갖기 위해 운동을 하고, 더 많은 지식을 쌓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등산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독서모임에 나오는, 이런 이들은 모두 니체 관점에서는 초인적이다. 


니체는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을 (조건부이긴 했으나) 초인의 유형으로 꼽았다. 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초인과, 위에 잠시 언급했던 과나의 <나만 찌질한 인간인가봐>를 아래에 링크한다. 


실은 내 개똥철학에 불과한 글을 참 길게도 썼다.   


니체를 읽는 사람 모두가 내 생각에 동의할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 분은 반박시 님말이 맞으니, 취미 독서가의 생각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 주시기 바란다.




https://youtu.be/otgbtLj148o



내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초인


https://youtu.be/F4HPOWRmG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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