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그 자체>, 울프 다니엘손
<세계 그 자체> 완독, 마나님과 늦은 저녁을 먹고 후기를 쓰려 노트북을 열었다.
<세계 그 자체>,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칸트로부터 시작된 물자체다. 그 자체의 세계란 우리의 외부에 우리의 인식이나 감각과 관련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한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내가 타이핑하고 있는 이 노트북은 남을 것이고, 당신이 갑자기 사라져도 당신이 들고 있는 핸드폰은 세상에 그대로 남아 중력 법칙에 의해 낙하할 것이다. 정말 그런가?
아니 이런 당연한 것에 대해 질문을 한다고? 정말로? 하지만 알지 않는가. 늘 이렇게 당연한 질문에서 놀라운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아시다시피 철학이다. 그리고 그게 철학이 재밌는 점이고.
여튼 이렇게 인간 의식의 대상이 인간의 지각과 사고에 관계없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철학적 견해를 실재론(實在論, Realism)이라고 한다. (유물적 실재론과 본질적 실재론을 사실은 구분해야 하는데, 일단 넘어간다) 언뜻 대상의 독립적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일상적으로는 당연히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 당연하고 당연하지 않은 얘기를 한 번 따라가 보자. 먼저 이렇게 질문하겠다. 무지개는 몇 개의 색으로 이뤄졌나?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인가?
과거 우리나라는 흑백청홍황, 다섯개의 색으로 무지개를 구분했다. 미국이나 영어권에서는 대개 무지개를 남색을 제외한 6색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남색을 파란색과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여기에 보라색까지 끼워 5색으로 인식한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빨강과 검정의 2색으로 구분한다고 한다.
자, 그렇다면 이제 무지개의 남색은 존재하는가? 우리가 무지개의 남색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기에 ‘남색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조상과는 달리 무지개에서 남색을 발견한다. 즉 우리가 없다면 무지개의 남색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무지개는 그저 신기루일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보는 사람에 따라 그 때 그 때 다를 수 있지.
좋다. 이 논증이 궤변 같다고 생각하면 좀 더 과학적인 예를 들어보자. 처음으로 무지개를 7색으로 구분한 사람은 다름 아닌 뉴턴인데, 뉴턴의 가장 유명한 발견은 중력의 원리에 대한 것이다. 중력은 떨어져 있는 두 물체에 작용하는데, 그 힘의 크기는 두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이 힘, 그러니까 중력은 존재하는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싶은가? 내가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것은 중력 때문이고, 내가 타이핑하고 있는 이 노트북이 우주로 솟구치지 않는 것이 중력 때문인데 중력이 존재하냐고? 내가 매 순간 경험하고 있는 이 명백한 중력이 존재하냐고? 이게 과연 질문인가?
그러나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중력이 역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확고부동한 출발점이다. 땅에 떨어지는 사과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반상대성이론에 부합하도록 구부러진 시공간을 따라 이동한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이유는 태양이 지구를 잡아 끌기 때문이 아니라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태양이 왜곡한 시공간의 곡률을 따라 지구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것 뿐이다. 일반상대성이론 방정식은 중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중력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하고 자신을 기술한다. 그리고 완벽하게 동작한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해보자. 아직도 중력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구 위에 서 있는 존재다. 뉴턴이 중력을 발견한 것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지구가 잡아당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력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즉 뉴턴이 발견하고, 우리가 인식하지 않았다면 중력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설명한 것은 실재론을 반박하는 실념론, 혹은 관념론 관점의 서술이지만 내가 이 관점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와 독립적으로 세계는 존재하는가? 하는 정답이 명백해 보이는 질문이 실은 그리 간단한 질문이 아니라는 것, 이는 철학과 과학을 관통하고 있는 오래되고 깊은 질문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긴 글을 썼다. 단지 와, 이런 관점이 가능하네?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그 시도는 성공한 것이다.
이 책 <세계 그 자체>는 스웨덴 물리학자가 과학과 철학 사이에 있는 여러 논의 꼭지들을 두루 살피고 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책이다. 그런데 혹시 이 분이 우리 #트레바리 모임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 청강자가 아니실까, 싶을 정도로 우리 모임에서 다루었던 소재만 쏙쏙 골라 다루고 있다.
대니얼 데닛, 토마스 네이글, 데이비드 차머스가 심리철학을 다루며 몽땅 나오고, 휴 에버렛과 에르빈 슈뢰딩거가 다중 우주에 대해 얘기하며 소환된다.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싸우고, 수학적 실체가 존재하느냐는 수학 실재론에 대한 논의도 등장한다. 인간의 특별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며 인류 원리가 등장했을 때는 정말 빵터졌다.
하지만 이 책 자체는 추천하기는 어렵다. 깊은 논의를 진행하기에는 책이 너무 짧고,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고 보기엔 논리나 예시가 빈약하다. 철학/과학 양쪽의 논의를 다 알고 있어야 읽힐 것이라서, 아마 이 근방의 책들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겐 쉽게 읽히진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딱히 추가된 지식은 없었다.
다만 스스로를 실재론자라고 소개하면서도, “우리의 바깥에 수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이 재미있어서 그 부분만 인용해 보겠다. 수학이 세계를 기술하는 언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인 문장일 것이다.
“과학을 수학적 논리에 기반한 어떤 체계로만 본다면 과학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유의미한 정보는 상호작용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의미가 생겨나는 것은 이 기호들이 현실 세계에,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선택하고 추상화하는 현실의 일부에 연결될 때만 가능하다. 고상한 관념과 비루한 자연계 사이에 연구자 자신의 체화된 의식이 놓여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과학의 본질이다.
수학과 논리라는 추상 세계와 우주 사이에 객관적이고 외부적이며 독립적인 연결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연결은 언제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뇌에서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