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필력의 한계 안에서만 이야기 소재를 골라낼 수 있다
글 쓰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소설을 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소설가는 자신의 필력의 한계 안에서만 이야기 소재를 골라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본 사람에겐 어떤 느낌인지 전달할 수 있는데, 이를 테면 미술을 보는 본인의 눈 보다 뛰어난 것을 손으로 그려낼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간단히 막장 드라마 하나를 설계해 보자. 남자A와 여자B가 사랑하는 사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여자B는 지난날 자신의 부모님이 남자A에게 피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여자B의 내면을 묘사하는 난이도는 어느 정도 될까?
최소한 이 사실을 몰랐을 당시의 B가 산책을 하거나 요리를 할 때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 보다는 훨씬 어려울 것이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선을 잡되, 독자가 느꼈으면 하는 정도만으로 조절하며 독자들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너무 오버하면 독자의 몰입을 오히려 방해하게 될 것이고, 묘사 수위가 너무 낮으면 독자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냉혈한으로 보여서)
만약 자신의 능력으로 이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어렵다 생각되면, 소설가는 플롯을 바꾼다. 부모님이 아니라 자신의 강아지였다고 하면 어떨까? 좀 낫지 않은가? 아니면 살해된 것은 부모님이었지만 A는 조력자 정도였다고 하면 좀 나을까? 이 정도는 묘사할 수 있을까?
필력 안에서만 이야기 소재를 골라낼 수 있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소설가는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이야기 소재를 선택할 수 없다.
묘사 뿐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쓰다 보면 반드시 플롯이 비약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위의 막장 드라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B는 A를 용서한다'는 플롯이 필요하다면 어떨까? 중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A를 용서해야 하는 플롯들을 쌓아 올린 후 용서를 시도하겠지만, 대가는 독자의 감정선을 교묘하게 컨트롤하는, 몇 무더기의 문단 만으로 이 일을 해낼 수도 있다. 이 것도 또한 필력에 달려 있다.
얼마 전 김훈 선생님의 <하얼빈> 인문학 강의는 팬심으로 찾아갔지만 소설가로서 내게 큰 위로가 된 자리였다.
안중근 의사(이하 안중근)에게는 김아려 여사(이하 김아려)라는 반려자가 있었다. 김아려는 안중근 보다 한 살 위였는데, 안중근 없이 세 아이를 키웠다. 안중근은 사냥을 핑계로 집에 잘 돌아 오지 않았고, 상해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밖으로만 돌았다.
안중근은 거사를 결심한 후, 사람을 보내 김아려와 자식들을 하얼빈으로 불렀다. 거사를 하고 나면 가족들이 조선 땅에서 더 이상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아려와 안중근의 자식들이 하얼빈에 도착한 것은 1909년 10월 27일이다. 그리고 안중근은 10월 26일에 이토를 쏘았다. 김아려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불러서 머나먼 타국에 와 보니, 남편이 살인범(혹은 테러리스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건의 참고인으로 검사 앞에 선 김아려는 내 남편은 이미 황해도에서 죽었고, 내 손으로 묻었다며 절규한다.
안중근이 죽은 다음 해, 장남 분도는 병으로 죽는다.
둘째 아들 안준생과 첫째 딸 안현생은 일제에 포섭되어 이토 히로부미의 묘를 참배하고 아버지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빈다. 아마도 김아려는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김아려는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상해에서 죽었다.
이상의 내용은 <하얼빈>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의 뒤편에 주석 처럼 붙어 있다. 어제 김훈 선생님은 이 이야기를 본문에 포함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영웅 안중근이 아니라 청년 안중근에 대해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안중근의 영웅적 행적 뒤에 얼마나 많은 아픔과 슬픔들이 있었는지 쓰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아려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마다, 나는 절벽 앞에 선 기분이 되었습니다. 여사가 느꼈을 좌절과 슬픔과 절망이 너무 커서, 내가 감히 이 것을 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여러번 시도했지만 나는 끝끝내 쓸 수 없어서, 결국 김아려 여사의 이야기는 주석으로 남겨 놓게 되었습니다."
나는 위에 "자신의 필력의 한계 안에서만 이야기 소재를 골라낼 수 있다"고 썼다. 무려 김훈과 같은 대가가, 그 이야기가 자신의 필력을 넘어선 이야기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옆에 있는 마나님께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순간 뜨겁고 뭉클한 것이 가슴에서 치밀어 올라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김훈 선생님 정도의 대가 앞에도 벽이 있구나, 하는 것이 소설가입네 하는 내게 어마어마하게 큰 위로가 된 한 편, 그 벽이 있음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할 수 있는 74세의 거장이 너무나 너무나 커다란 거인처럼 보였다.
김소월의 <산유화>를 제일 좋아하신다는 김훈 선생님, 건강하게 오래 사셔서 좋은 작품 많이 남겨 주시기를.
https://blog.naver.com/iyooha/222882789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