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 서문>, 이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서문>을 다 읽었다.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초판과 재판에 실린 서문과 저자의 '들어가는 말'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리고 서문과 비슷한 분량의 역자 해제가 뒷부분에 실려있다.
대개 작가들은 본문을 모두 다 쓴 다음, 서문과 나가는 글을 쓴다. 책을 쓰는 과정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책을 다 쓰고 나면 생각과 논리가 정제된다. 그 정제된 내용을 적는 것이 서문이다.
그래서 독서가들 중에는 '본문을 읽기 전에 서문을 읽지 말라'고 권하는 이도 있다. 서문은 대개 구체적인 논리 없이(구체적인 논리는 물론 본문에서 다룬다) 책의 문제의식과 결론을 담고 있기 때문에 처음 접하면 본문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순수이성비판>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이 책 역시 아마 읽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여튼 이 책을 읽고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써볼까, 하다 칸트의 기획에 대해서 써보기로 했다. 이 책의 문제의식, 즉 칸트가 무엇을 이루고 싶어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책을 썼는지에 대해서 쉽게 적어 보겠다.
칸트는 중요한 시대를 살았다. 칸트는 1724년에 태어나 1804년에 죽었다. 푸코의 시대구분에 따르면 고전주의 시대의 한복판에 태어나 근대의 탄생과 함께 죽은 것이다. 이 시대는 과학이 학문의 방법론으로 떠오르던 시대다.
우리는 당연한 듯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어떤 이들은 이 말에 신뢰를 넘어 신봉까지 보내지만, 과학이 지식의 수호자 역할을 맡게 된 것은 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적어도 칸트 시대의 과학은 지금보다 훨씬 작은 역할 만을 맡았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담은 뉴턴의 저서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다. 그 시절에 과학은 자연을 설명하는 철학의 한 분과에 불과했다.
신의 존재, 영원 불멸, 인간의 자유, 같은 것들이 형이상학의 주된 관심사이던 그 시절에 과학의 입지는 좁았다. 당시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은 과학은 제대로 된 학문이 아니라고 까지 말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과학에 별 신뢰가 없었던 것 뿐만이 아니라, 과학을 지식을 담을 수 없는 '유사 학문'으로 생각했다.
과학이 학문이 아니라는 흄의 논리는 생각보다 정교하다. 그런데 <순수이성비판>의 기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흄을 조금 알아야 한다. 내가 최대한 쉽게 설명해보겠다.
흄은 모든 명제를 선험적 명제와 후험적 명제로 구분한다. 선험적, 후험적이라는 단어가 생소할텐데, 둘 다 어려운 단어는 아니다. '선험적'은 글자 그대로라면 '경험에 앞선'이라는 뜻이지만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으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즉 선험적 명제는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명제다. 예를 들어 7+5=12 같은 명제나, '두 점의 최단거리는 직선이다' 같은 명제는 선험적이다. 7+5=12가 맞는지 굳이 돌멩이 열 두개를 가져다 더하고 세어보지 않아도(경험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 명제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후험적 명제는 그냥 '경험적 명제'로 바꾸어 읽어도 된다. 후험적 명제는 옳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꼭 경험이 필요한 명제다. '철수는 팔씨름을 잘 한다'는 명제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면 철수와 팔씨름을 해보아야 한다.
선험적 명제와 후험적 명제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필연성이다. 선험적 명제는 반드시 참이다. 경험이 필요 없다는 말은 잘 생각해보면 필연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반대로 경험적 명제는 필연적이지 않다. 철수가 운동을 열심히 해왔고, 그래서 경험해본 결과 팔씨름을 잘 할 수도 있지만 그건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경험이 필요하다는 말은 잘 생각해보면 우연적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명제를 나누는 다른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분석적 명제와 종합적 명제로 명제들을 나누는 것이다. 약간 더 어려운 개념일 수 있는데, 역시 또 최대한 쉽게 설명해 보겠다.
분석적 명제는 주어가 이미 술어의 개념을 포함한 동어반복 명제를 말한다. '모든 총각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라는 명제를 살펴보자.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성을 의미하는 단어이므로 이 명제의 경우 필연적으로 참이다. 분석적 명제는 자신 스스로를 분석하여 참 거짓을 구별해낼 수 있다.
반면 종합적 명제는 명제 내부를 분석해도 참 거짓을 확인할 수 없는 명제를 말한다. '철수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명제를 살펴보자. 철수는 결혼을 했을 수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명제가 참인지 참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철수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당연해 보이는 이 구분에 흄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분석적 명제는 지식을 담고 있지 않으며, 지식은 종합적 명제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그러하다. 분석적 명제는 주어의 의미를 술어로 풀어 썼을 뿐이다. 동어반복으로는 지식을 추가할 수 없다.
반면 종합적 명제는 지식을 담고 있다. 철수가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철수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철수에게 물어본 결과 결혼을 했다면,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다. 아, 철수는 결혼을 했구나, 하고 말이다. 그래서 종합적 명제는 지식을 담고 있다.
자, 여기까지 어렵게 오셨다. 이제 흄의 결론이다.
흄은 수학은 선험적-분석적인 명제라고 말한다. 7+5=12라는 명제는 경험이 필요 없는,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이지만 등호의 좌변과 우변이 같은, 동어반복적인 분석적 명제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참이긴 하지만 위에서 밝힌 대로 지식을 담고 있지는 않다.
또한 흄은 물리학은 경험적-종합적 명제라고 말한다. 뉴턴 물리학이 계산한 경로로 태양계의 항성들은 움직인다. 이는 지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적으로 확인이 필요한 지식이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필연성을 결여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흄의 논리대로는 뉴턴 물리학은 우연히 참이다.
즉 이렇게 생각하면 수학은 참이긴 하지만 지식은 아니며, 물리학은 지식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우연히 참일 뿐이라는 것이 흄의 주장이다. 동의가 되는가?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흄과 같이 사고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형이상학과 신학이 지식의 최고 방법론이던 시대에, 즉 지식의 방법론으로 이미 답이 정해져 있던 시대에, 수학과 과학은 지식을 추가하지 못하며, 추가하더라도 그건 우연일 뿐이라는 흄의 이 논리에 맞서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흄의 시대를 고려하면, 당시의 칸트는 대단히 진보적인 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신의 존재, 영원 불멸, 인간의 자유 같은 종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들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인간의 차가운 이성이 지식의 주체가 되어 다루는 것들이 지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성의 방법론은 종교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물론 수학적, 과학적인 것이다. 칸트는 당시의 형이상학적 논쟁들이 무의미함을 밝히고, 우연히 그럴 뿐인 자연에 대한 과학을, 필연적인 것을 발견해내는 지식으로 격상시키고 싶었다. 칸트는 뉴턴을 구원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순수이성비판>을 쓰기 시작하던 당시 칸트의 문제의식이었다. 칸트는 과학의 정당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논증하고자한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는 어떻게 흄의 논리를 무력화할 수 있을까? 흄에 의하면 수학은 선험적-분석적이고, 물리학은 경험적-종합적인데, 칸트는 싸움의 무대를 옮긴다. 칸트는 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선험적-종합적 영역에 수학과 물리학을 가져다 놓는다. 즉, 수학적, 과학적 명제들이 경험을 통해서만 참 거짓을 확인할 수 있지만, 경험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임을 밝힌다.
이 모순적인 조합, 그러니까 선험적이면서 동시에 종합적인, '선험적 종합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인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는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하지만, 이 전회에 대한 설명은 예전에 써 둔 칸트의 관념에 대한 글로 대신한다.
<순수이성비판>은 놀라운 책이다. 이 책 한 권이 이뤄낸 철학사적 업적은 정말 엄청나다. 칸트는 이 책으로 과학이 세계에 지식을 추가할 수 있는 정당한 방법임을 밝힘은 물론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세계가 우리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음을 밝혔으며,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오래된 논쟁을 끝냈고, 헤겔로 완성되는 독일 관념론의 시대를 열었다.
서양 철학을 읽다 보면 '칸트의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로 흘러들어가고,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은 칸트로부터 나온다'는 문장을 만나게 되는데, 칸트를 공부하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이다.
서문만 읽었을 뿐인 <순수이성비판> 본문을 언제 읽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칸트를 조금 읽었고, 하반기에 기회가 된다면 헤겔을 읽어보려고 한다.
오늘도 길었던 독후감 끝.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세계는 우리의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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