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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19. 2023

빨간 사과는 없다

<왜 칸트인가>, 김상환



일단 이 책은 추천부터 하고 시작한다. 잘 쓴 입문서의 모범적 사례라고 할 만하다. 칸트는 많은 책을 썼지만 그의 주저를 꼽으라면 모두가 3대 비판서를 꼽는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인데, 이 책에서 서울대 김상환 교수님은 한 챕터에 책 한 권 씩, 칸트의 사유를 따라가며 아주 쉽게 해설한다. 본인의 해석은 줄이고, 우리 시대에 표준적으로 해석되는 칸트에 대해 설명한다. (칸트는 오랫동안 많이 연구되어서 재해석의 여지가 적기는 하다) 거기에 예제와 도표로 이해를 돕는 센스까지 갖추었다.


비유로서 칸트의 위상을 소개하는 것으로 후기를 시작해 보겠다. 칸트는 호수다. 칸트 이전의 모든 서양 철학은 칸트로 흘러 들어갔고, 그 이후의 철학은 모두 칸트라는 호수에서 갈라져 나온 물줄기이다. (내가 만든 표현은 아니다) 혹자는 ‘2천년 서양 철학의 역사는 실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을 빌려, ‘칸트 이후의 철학은 실은 칸트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한다. (나도 동의한다)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을 종합했고, 데카르트를 극복하고 자아를 발견하고, 진선미에 대한 비판서로 윤리학과 미학에 대한 기초를 닦는 등, 칸트의 작업들은 한 사람이 해냈다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과학에 이 정도 업적을 남긴 사람은 아마 뉴턴 정도일 것이다.


오늘 나는 그 많은 칸트의 업적 중에서 ‘관념’에 대해 조금 써보려고 한다. 내가 철학을 읽으면서 정말 놀라웠던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이 칸트의 ‘관념’을 이해한 순간이었다.


철학의 오래된 질문 중 하나는 인식認識에 대한 것이다.


A: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B: 내 눈 앞에 빨간 사과가 있다.


이 두 질문 중 어느 쪽이 더 확실한 진실로 보이는가? 아마 A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과학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트가 살던 시절, 유럽 사상가들은 이 문제를 두고 첨예하게 맞섰다.


인간의 선천적인 이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대륙의 합리론자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은 A를 지지한다. 시각, 후각, 청각 등 감각은 교란이 가능하고 우연적이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은 경험을 배제하고 합리적 이성만으로 보편적 앎을 추구하려 했다.


반면 영국의 경험론자들, 로크, 버클리, 흄 등의 철학자들은 이성적 능력만으로는 유의미한 지식과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경험론자들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는 귀납적 자연과학이 확실하고 참된 지식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B를 지지했다.


자, 그럼 이제 칸트의 생각을 따라가보자. 칸트는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사과가 빨갛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터무니없어 보이는 거 안다. 조금만 참고 몇 줄 더 읽으면 재밌어진다.)


먼저 광원이 있다. 태양이든 형광등이든 어딘가에서 발사된 광자가 사과의 표면과 만나서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튕겨 나온다. 광자는 파동이기도 한데, 이 때 튕겨 나온 광자의 파장 길이는 대략 750nm 정도가 된다. 이어 이 광자는 망막에 닿고, 시각세포는 이 750nm 길이의 파장을 특정 전기 신호로 바꾼다. 시신경을 따라 뇌까지 이 전기신호가 전달되면 뇌는 알아차린다. 아, 빨간색이로구나. 뇌는 눈도, 코도, 어떠한 감각기관도 갖고 있지 않다. 오로지 신체의 각 부분에 연결된 신경을 통해 전기적 신호를 받아들인다. 이 신호들이 종합과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 짜잔, 눈 앞에 빨간 사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빨간색’이 과정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광자의 파장 길이와 시각세포가 발생시킨 전기적 신호, 시신경이 이를 뇌에까지 운반하는 과정 그 어디에도 빨간색은 없다. 그렇다면 대체 빨간색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신체의 바깥쪽에 있는가, 내 안에 있는가?


합리적으로 후자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제 엄청난 질문을 만나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다채로운 색깔로 드러나는 우리의 외부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빨간색이 내 안에 있는데, 외부의 세계가 바깥에 있을 수 있을까?


비로소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세계는 실은 우리의 내면에 비친 세계이다. 진짜 세계가 아니다. 사과는 우리 인식의 원인이 아니다. 사과는 결과다. 인식이라는 과정을 통해 탄생한 심상心象, 즉 이미지인 것이다. 칸트는 기존 인식론이 가지고 있었던 당연한 것, 인식 대상의 위치를 인식 주체의 바깥에서 주체의 내면으로 옮겨온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외부 세계는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과정을 통해 해석되어 내부에 존재한다. 놀랍지 않은가? 이렇게 관념론이 탄생한다.


그리고 나서 칸트는 최초의 질문에 대답한다. 확실하고 참된 지식은 어떻게 얻는가? 칸트의 대답은 이러하다. 진리의 기준은 외부의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주관에 있으므로, 우리는 인식된 대상에 앞서 인식하는 주체의 한계와 능력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는 진짜 대상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해석된 대상뿐이다. 그러니 확실하고 참된 지식을 논하기 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작업을 ‘비판’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의 주저 제목은 <순수이성비판>이다.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세계는 경험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 후, 인식의 형식을 거쳐 내면에 떠오른다. 이 때 이성은 우리 내면에 이미 있었던 ‘빨간색’을 그 사과에 입힌다. 칸트는 이렇게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합한다. 인식론에 대한 두 철학사조의 오랜 싸움이 끝난 것이다.


자, 관념에 대해 긴 글을 썼는데, 여기까지 읽었으면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가 실은 뇌에 의해 해석된 것이라면, 진짜 세계는 어떻게 생겼나?


몇 대의 카메라를 사과 앞에 가져와 보자. 하나는 캐논 미러리스 카메라다. 이 카메라로 사과를 찍으면 먹음직스러운 빨간 사과가 찍힐 것이다. 이번엔 흑백 필름이 장착된 필드 카메라를 가져와 보자. 회색 사과가 찍힐 것이다. 이번엔 엑스레이가 달린 카메라를 가져와 보자. 아마 이번엔 사과 내부의 씨까지 생생하게 찍힌 사진을 우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Vladyslav Starozhylov, Royalty free w/watermark



이 중 어느 사과가 진짜 사과에 가까울까? 진짜란 무엇일까? 빨간 사과와 흑백 사과, 그리고 씨가 보이는 엑스레이 사과 중 어느 것이 진짜 사과인가? 그것을 누가 정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지금 보이는 것처럼 보는 것은 실은 우연이다. 우리의 눈에는 캐논 미러리스 카메라와 유사한 카메라가 달려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처럼 세상을 경험한다. 이 우주에서 이 세상을 우리처럼 경험하는 것은 우리, 인간 종족 뿐이다. 그리고 인류는 우리 인간이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에게서 이미 배웠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인간 종족에게 보이는 우주는 진짜 우주가 아닐 것이다.


다른 관점을 생각해 보자. 만약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그 카메라로는 진짜 사과를 찍을 수 있을까? 이것도 재밌는 생각이다. 정말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카메라가 존재한다면, 그 카메라로 사과를 찍으면 아마도 아무것도 찍히지 않을 것이다. 단 한 줄기 빛도 없이 새카만 사진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입자들이 찍혀 있을 것이다. (찍혔지만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물과 모든 우주의 99.9% 이상은 텅 빈,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나와 당신과 사과를 구성하는 모든 양자들은, 아주 작은 핵과 텅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도, 당신도, 사과도, 세계도, 지구도 실은 텅 빈 공간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암흑 속에서 가끔 만나는 입자들이 저마다의 에너지를 가지고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면, 이것이 세계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결론이다)


이러한 세계, 우리의 감각을 초월해 있는, 우리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진실의 세계를 칸트는 물자체物自體 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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