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며>, 김훈
김훈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완독, 주말 오후에 마나님이 사오신 커피에 막내딸이 구운 쿠키를 먹으며 후기를 쓴다.
앞선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와 완독 타이밍이 비슷한 것은 우연이다. 실은 나는 책 서너 권을 동시에 읽는다. 나 스스로는 이 책을 술-책, 밥-책, 차-책, 이라고 부른다.
술-책은 퇴근하고 위스키 한잔 곁들여 읽는 책이다. 가끔 아침에 일찍 일어난 날, 자전거와 근력 운동 루틴을 마치고도 출근까지 시간이 남으면 펼치는 책이기도 하고, 주말에 마나님과 양재천 산책을 마치고 들르는 단골 카페에 들고 가는 책이기도 하다, 보통은 이 책이 메인 책이다. 최근에 읽은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 <왜 칸트인가> 등은 술-책이었다.
밥-책은 점심시간에 읽는 책이다. 밥을 먹으면서는 집중이 잘 안되고, 보통은 스마트 폰이나 태블릿으로 보게 되기 때문에 e-book 형식의 가벼운 책을 읽는다. 보통 소설류를 읽는데, 최근엔 김훈 선생님의 책들을 밥-책으로 삼고 있다. <칼의 노래>, <저만치 혼자서> 등이 밥-책이었고, 오늘 완독한 <라면을 끓이며>도 밥-책이었다.
차-책은 출퇴근 때 오디오 북으로 듣는 책인데, 요즘엔 없다. 요즘엔 예도 선생님 강의가 오디오 북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효, 또 서두가 길었다. 소설가 명함을 판지 24년인데, 여전히 틈만 나면 주저리주저리 글이 길어진다.
<라면을 끓이며>는 김훈 선생님(이하 김훈)이 여기 저기 기고했던 글들을 한데 묶은 산문집이다. 그리고 나는 제목이 다했다고 생각한다. 제목에서 김훈은 이미 “네가 뭐라 생각하든 나는 먹고 사는 얘길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라따뚜이>에서 음식 평론가 ‘이고’는 ‘왜 이렇게 말랐느냐’는 질문에 “나는 맛없는 음식은 삼키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이고에게 음식은 생존을 위한 섭취 대상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이렇게 쓴다. “밥에는 대책이 없다. 한두 끼를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죽는 날까지 때가 되면 반드시 먹어야 한다. 이것이 밥이다. 이것이 진저리나는 밥이라는 것이다.” 김훈에게 밥이란 내가 몸을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나에게 되뇌는 수단이며, 되뇌는 순간이다. 김훈의 밥은 이고의 음식과 다른,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무엇이다.
김훈이 그의 소설 속에서 밥에 대해 쓰는 장면은 수도 없지만, 딱 한 장면만 가져와 보겠다. <칼의 노래>의 한 장면이다.
이철은 배로 떠났다. 이철의 배에 군량 서른 가마를 실어주어 우선 죽을 쑤어 먹이도록 했다. 군량은 명량에서 깨어진 적선에 올라 빼앗은 쌀이었다. 적들에게 빼앗긴 연안 백성들의 쌀이었다. 내가 적을 죽이면 적은 백성을 죽였고, 적이 나를 죽인다면 백성들은 더욱 죽어 나갈 것이었는데, 그 백성들의 쌀을 뺏고 빼앗아 적과 내가 나누어 먹고 있었다.
<칼의 노래> 中
나와 적은 서로를 죽이는 사이다. 하지만 나도 적도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이 없으면 빼앗아라도 먹어야 한다. 전쟁과 정치와 이데올로기 성립 이전에 밥이 있다. 김훈에게는 밥이야 말로 모든 담론을 물러서게 하는 거대담론인 것이다.
그러니 <라면을 끓이며>는 김훈의 핵심 담론을 담은 산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비장의 라면 레시피를 알려주시겠다더니, 물을 700ml 붓는 한강라면 레시피를 적으시는 부분에서 빵 터졌다. 좋은 소설가는 좋은 요리사가 아닐 수 있다)
또한 김훈의 소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다름 아닌 똥이다. 내가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쓴 적이 있는데, 내가 아는 한 김훈은 ‘똥 얘기를 가장 실감나게 쓰는’ 작가다. (그 최고봉에는 <남한산성>이 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내내 똥 냄새에 시달렸다) <하얼빈>은 장마 때 변소가 넘쳐 길거리에 똥덩이가 떠다니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남한산성>의 새로운 봄은 밭에 똥물을 뿌리는 것으로 온다.
밥과 똥에 대해 진지한 태도, 나는 이러한 김훈의 태도에서 완고함과 함께 결연함을 느낀다. ‘먹고 사는 것’ 보다 고귀한 것은 없다는 태도, 실존성을 일깨우는 태도다. 우리는 모두 몸을 가진 생물학적 존재이고, 먹고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적 과업이다. 정치, 학문, 예술, 이데올로기, 그 어떠한 가치도 이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 그 지점에서 김훈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는다.
김훈은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무슨 지순하고 지고한 가치가 있어? 나는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문학이 있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이 인터뷰를 뒤늦게 읽으며 나는, 훨씬 날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 김훈은 니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니체는 학문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한다. 학문이 추구하는 불변성, 보편성을 비웃는다. 반면 예술은 창조적인 점을 들어 긍정한다. 학문과 예술의 우열을 가리고 난 후, 니체는 예술과 학문 양쪽이 모두 더 좋은 삶을 촉발하는 전제로만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즉 니체는 학문과 예술과 삶에 위계를 부여한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학문보다 예술이, 예술보다 삶이 더 높은 지위를 갖는다.
이 지점에서 김훈은 니체와 같아진다. 삶을 넘어서는 예술이 없는 것처럼,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하는 문학 따위는 없다. 그런 개소리를 하는 놈들은 죽어도 되는 것이다.
<라면을 끓이며>는 그래서 김훈의 작가해제 같은 산문집이 된다. 김훈의 화두와 관심사와 평소의 사유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김훈이 이래서 그렇게 읽혔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김훈의 주요 저작들을 다 읽은 후, 마지막으로 읽기를 권한다.
끝으로 가장 좋았던 문구로 재미없는 후기를 마무리하려 한다. <라면을 끓이며>에 수록된 <11월>이라는 산문에서 가져온 문구다.
자전거를 타고 임진강 쪽으로 나갔다가, 11월의 마지막 나비를 보았다. 늙고 병든 나비였다. 날개가 부서지고 무늬가 망가진 나비였다. 늙은 나비는 메마른 들꽃을 물고 가을 바람에 시달렸다. 바람이 몇 번 더 불어오면 들꽃은 땅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바람이 들판을 스칠 때, 나비는 바람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이리저리 휩쓸렸다. 아, 저것이 내가 기어이 보려 했던 가을 벌레의 임종이로구나…
나는 오랫동안 나비를 들여다보았다. 나비는 바람에 날개를 뜯기면서, 애초에 바람이었던 것처럼, 바람에 풍화하고 있었다. 나는 나비들이 바람 속에서 죽는다는 것을 알았다. 죽어서 바람이 되어, 들판 저쪽으로 불어간다.
<라면을 끓이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