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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20. 2023

불교: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 법상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히말라야 기슭 작은 왕국에 왕자가 태어났다. 왕과 왕비에게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왕자의 탄생을 기뻐했다. 


어느 날 히말라야 산속에서 수행하던 은둔자가 왕을 찾아와 왕자를 알현한 후 이렇게 말했다. “왕자님은 세속에 계시면 세계를 다스리는 성왕成王이 되실 것이고, 출가하면 모든 이를 구제하는 붓다(깨달은 자)가 될 것입니다.” 은둔자는 말을 마치고 통곡했다. 왕이 왜 우느냐 물으니 은둔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왕자님은 출가하여 붓다가 될 터인데, 저는 그 가르침을 듣기 전에 늙어 죽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이 왕국에 필요한 사람은 붓다가 아니라 이 작은 나라를 지켜낼 왕이라고 생각했다. 왕자의 출가를 막기로 결심한 왕은 동서남북의 성문을 모두 닫았다. 그리고 늙고 병든 이들, 가난한 이들을 성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했다. 성 안에는 젊고 생기 있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남았다. 왕은 왕자가 세상의 향락에 빠져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왕자는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왕자는 성 밖의 세상이 궁금해졌다. 그는 하인을 졸라 몰래 성 밖으로 나갔다. 성 밖에 나간 왕자는 처음 보는 장면에 깜짝 놀랐다. 처음으로 늙고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것을 보고 왕자는 하인에게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인은 모든 이들은 늙고 병들어 죽는다고 대답했다. 왕자는 비로소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했다. 


왕자는 생각했다. ‘무엇이 이 세상에 고통을 가져오는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을 끝낼 수 있는가?’ 왕자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한편, 이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열망도 함께 느꼈다. 이 왕자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는 오랜 수행과 고행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명상을 통해 우주와 자아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초기 불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초기 불교, 그러니까 싯다르타의 궁극의 가르침은 연기緣起와 사성제四聖諦다. 연기를 깨달음으로 인해 사성제를 수행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표다. 아주 간단하게만 살펴보자.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이다.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혹은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다. 인因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원인이다. 자 이게 무슨 말일까?


길가에 예쁜 꽃이 피었다. 이 꽃은 어떻게 피어나게 되었을까? 꽃이 있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因은 씨앗일 것이다. 꽃은 씨앗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씨앗만 있으면 꽃이 피어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꽃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흙, 태양과 공기, 물, 꿀벌이나 농부의 도움緣이 필요하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것들은 이처럼 인과 연에 따라 발생하는 것이다. 혼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서로 영향을 주며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면 놀라운 생각에 닿을 수 있다. 흙, 태양과 공기, 물, 꿀벌이나 농부의 도움은 확실히 있었다. 즉 인과 연은 있었다. 그런데 꽃은 있는가? 꽃과 씨앗 중 어느 것이 그 존재의 본질에 가까운가? 


물 한 방울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물방울은 잠시 후 증발하여 수증기가 되었다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된다. 구름이 충분히 무거워지면 날씨에 따라 비, 눈, 우박이 되어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땅에 떨어진 물은 나무에 흡수되어 수액이 되었다가, 과일이 되어 인간에게 먹힌 다음 피나 눈물이 되기도 한다. 이것들 중 대체 ‘물’의 실체는 무엇인가? 


비로소 우리는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인연은 있지만 실체는 없는 것이다. 흙, 태양과 공기, 물, 꿀벌이나 농부의 도움은 있지만 꽃은 없고, 과일이 인간에게 먹히는 행위는 있지만 물은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인연에 따른 변화 뿐이다. 세상 만물은 인연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계속하여 변한다. 


그런데 우리는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늙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병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늘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고, 내가 가진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기에서 고통이 발생한다. 이것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는데, 변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삶은 괴로움이 된다는 뜻이다. 즉 고통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을 붙잡는 ‘나’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나’는 있는가? 잘 생각해보자. 인체를 구성하는 3천 억 개의 세포는 매일 새로 태어나고 죽는다. 80일이 지나면 내 몸의 모든 세포는 모두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사실 '내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생각 또는 분별이 있을 뿐이다. 이것을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외롭다고 느낄 때, 나는 외로움을 느끼는 주체를 나로 규정한다. 그러나 진실은 외롭다는 느낌이 잠깐 임시로 연기因起된 것일 뿐, 실체가 아니다. 그 느낌은 '내 느낌'이 아니다.


정말 '나' 라는 것이 있고, 내가 내 소유물이라면 나는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원해서 태어났는가? 당신의 외모와 키를 선택했는가? 밥을 먹으면 당신이 소화를 시키는가? 병들고 죽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철저히 내가 만들어낸 개념이고 환상이고 거짓이다. 이것이 무아無我다.


위에서 고통은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을 붙잡는 ‘나’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다. 즉 내가 없다면 그 고통도 나의 것이 아니다. 그저 인연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변화일 뿐이다. 불교는 이 연기법緣起法을 철저히 깨닫는 것을 수행의 목표로 한다. 그리고 연기를 깨달음으로 인해 고통을 없애는 과정을 사성제四聖諦라고 한다. 


어떤가, 그럴 듯 한가? 내가 이렇게 간단하게 불교의 교리를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마 불교 교리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 것이지만, 어쨌든 불교의 핵심 교리는 이렇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기 어려운 진리에서 출발한다. 내가 이 부분에 크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이것이 현대 신경생리학과 심리철학의 결론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깨어났다. 우리는 우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안다. 잠이 들었을 때는 사라지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분명히 있다. 샤워기를 틀었을 때는 샤워물의 뜨거움을 느끼고, 세수를 할 때는 비누거품의 부드러움도 느낀다. 아침으로 준비한 계란 스크램블의 고소함과 우유 한 잔의 시원함도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내 몸을 원자 단위로 분해하면 그 안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의 99%는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칼륨, 인으로 되어 있다. 남은 1%의 85%는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원자들 중 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가? 


좀 더 생각해보면 계란 스크램블의 고소함이라는 것도 정말 이상한 것이다. 내 혓바닥엔 미각세포와 지지세포로 구성된 1만개의 미뢰가 있다. 이 미뢰는 침에 용해된 음식을 '맛'으로 느낀다. 미각세포는 뇌에 있는 신경세포에 전기신호를 전달하고, 그 결과로 우리는 고소함을 느낀다. 고소함은 실은 전기신호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뇌가 만들어낸 어떤 '느낌'인 것이다. 우리는 순간 순간 뇌가 만들어낸 어떤 ‘느낌’으로만 존재한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혓바닥과 계란 스크램블이 연기緣起하여 만들어낸 느낌만이 존재한다. ‘나’는 없는 것이다. 


이 책 <도표로 읽는 불교 교리>는 트레바리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 시즌2와 시즌3 사이의 인터류드 강의로 <불교> 강의를 초빙했기 때문에 읽었다. 아는 만큼 들리겠지, 큰 기대 없이 집었는데 나님을 칭찬한다. 사고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졌다. 불교는 기대보다 훨씬 놀라웠다. 서양 과학과 서양 철학에 2,500년 앞서, 동양 철학은 이미 ‘내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서양 철학이 그렇게도 붙잡고 싶어했던 ‘대상’이 불교에서는 그저 연기緣起할 뿐 논의 전체에 통합되어 있는데, 세계관 자체가 이원론적인 서양 철학과, 일원론적인 동양 철학이 어떻게 다른 출발점에 서 있는지도 어렴풋이 알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다른 책을 핑계로 써 보도록 하겠다. 


그럼 책을 빙자한, 하고 싶은 얘기 쓰는 컨텐츠 끝 �






이 이야기가 재밌으셨다면, 같은 이야기를 하는 서양 철학의 입장도 살펴보세요 


https://brunch.co.kr/@iyooha/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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