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서재>, 장대익
이 책은 서평집이다. 서울대 장대익 교수님이 본인이 읽었던 책들을 간단하게 소개하는 책이다. 대략 60권 정도의 책들이 소개된다.
장대익 교수님은 기계공학도 출신 과학철학자/진화학자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쩐지 나는 묘한 공감대를 느낀다.
얕고 넓게 읽는 것이 본래 내 모토인데, 요 몇 년 어쩌다 보니 (형이상학 등) 특정 분야를 좀 깊게 읽고 있는 것 같아서, 새로운 관심 분야를 찾아볼까 하고 이 책을 골랐다. 내가 공감을 느끼는 장대익 교수님이라면 틀림 없이 내가 눈이 번쩍 뜨일 분야를 소개해주시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어 군데가 벌써 눈에 띈다.
첫번째 분야는 진화론적 유신론이라는 분야다. 진화론과 종교(그리스도교)는 양립 가능한가? 민감한 주제지만 대개는 이 두 믿음 중 하나를 가진 자들은 대개 서로의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믿음은 '진화론은 무신론이다'라는 명제 뿐이다. 그래서 진화론과 종교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된다.
이렇게 과학과 종교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사람들 중 이 양자택일의 강요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영토 분리를 선언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진화론은 사실적 진술인 반면 종교는 가치적 혹은 윤리적 진술이므로 서로 겹치거나 충돌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인데, 단속평형설로 유명한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러한 입장이다.
진화적 유신론은 이러한 입장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다윈 안의 신>의 저자, 종교학자 존 호트는 '과학적 설명은 종교적 이해를 심화시키는 핵심 동력이며, 종교적 사고는 과학 탐구의 동기와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 두 분야는 협력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진화론이 무신론의 증거가 될 수 없고, 자연과 인간, 우주에 대한 통전적統全的 이해를 위해 진화론과 종교가 모두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양자택일이나 영토분리의 대안으로 '진화론적 유신론'을 제안한다.
나는 환원주의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내게 이러한 입장은 일종의 위태로운 줄타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다. 예를 들어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공감하지만 여전히 크리스찬인 내 파트너 Ethan Kim 이 가지고 있는 고민에 내가 다가갈 수 있는 공감수단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에 크게 유행했던 진화심리학, 그리고 사회생물학과 그에 대한 반론에 대한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진화론과 심리학을 결합한 학문으로, 인간과 동물의 심리를 진화적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위에 언급한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가 이 분야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학자다)
당신이 어느 2층짜리 커피숍에 들렀는데, 모든 자리가 비어있다. 당신은 어느 자리를 선택하겠는가? 십중팔구 당신은 2층의 창가 자리, 그 중에서도 가장 밖이 잘 보이는 자리를 선택할 것이다. 왜 그런가? 2층의 창가 자리는 우리가 바깥을 잘 관찰할 수 있지만 밖에서는 쉽게 우리를 볼 수 없는 자리다. 70만년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발생한 우리들의 조상은 포식자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러한 위치를 선호하게 되었고, 그런 경향을 가진 유전자가 진화적으로 현대의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진화 심리학은 많은 심리적 사실들을 이렇게 진화적으로 설명한다.
도킨스를 위시한 진화심리학자들은 '언젠가 심리학과 진화심리학은 동의어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이와 비슷하게 에드워드 윌슨을 위시한 사회생물학(진화심리학과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행동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자들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이 생물학의 한 분과가 될 것'이라 단언한다.
에드워드 윌슨은 내가 보기엔 완전히 도취되어 있는 것 같다
극단적으로는 윌슨은, <다윈, 에드워드 윌슨과 사회생물학의 승리>에서(제목을 다시 읽어보라) 남성의 강간이 번식 성공도를 높일 수 있는 생물학적 수단이라고 주장하고, 양부모에게 입양된 아동이 학대될 가능성이 친부모 보다 70배가 높다는 사실을 자연선택론을 들어 설명한다. 그렇게 말하고도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을지언정 이 것이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라고까지 말한다. 윌슨은 자연적인 것, 혹은 진화된 것과 도덕적으로 정당하거나 옳은 것을 혼동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과학주의가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들의 주장에 섣불리 맞서기 어려워 보이지만, 이 분야에도 역시 강력한 반론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유전학자(어떻게 유전학이 마르크스주의적일 수 있는지는 나는 아직 상상이 안되는데,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분류된다고 한다) 리처드 르원틴은 현대 생물학이 기대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이른바 '유전자 환원주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르원틴에 따르면 인간 본성에 대한 사회생물학 이론은 세 단계로 구성된다.
1. 인간이 가진 보편적 특성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
2.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특성들이 실제로는 우리 유전자 안에 암호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
3. 그런 특성들이 개체의 차별적 생존과 번식을 통해 자연선택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르원틴은 이런 각 단계마다 수 많은 오류가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며 이런 특성들이 유전적으로 암호화되어 있다는 생각은 비가법적 상호작용 유행이 드러내주는 바와 같이 문제 있는 발상이라고 주장한다.
또 쓰다 보니 길어졌는데, 나는 이 책이 무척 재미있었다. 전혀 모르는 분야에 대한 책을 60권이나 미리 살펴본 체험이었으니까.
다만 너무 얕기 때문에, 지식을 얻을 목적으로 이 책을 읽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의 논쟁과 갈등에 관심이 있거나 철학과 과학, 혹은 진화론과 종교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거나 고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다음 읽을 책을 찾는 데는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고 장대익 교수님이 팬이 됐다. 서울대에 이렇게 좋은 교수님이 많은 줄 알았으면 고등학교 때 공부 열심히 했을텐데.
다시 대학에 갈 수는 없으니, 대신 장대익 교수님 책들을 카트에 왕창 쌓아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