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자>, 김재인
현대 철학을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한 철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들뢰즈일 것이다. 철학 전공자들이라면 누구나 전공하고 싶어하고 연구하고 싶어하는 철학자다. 푸코, 데리다와 함께 니체 철학의 계승자이면서, 동시에 포스트모던의 상징과도 같은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경희대 김재인 교수님은 들뢰즈를, 그 이전까지의 철학을 모두 종합하여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비유하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그 시대의 논박을 종합하여 질료형상론을 제시하지만, 이 글의 관심 범위는 아니니 다음에)
철학의 오래된 질문 중 하나는 '존재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손톱을 깎으면 나는 방금 나를 잘라낸 것인가? 내가 방금 먹은 햄버거는 언젠가 내 몸의 일부가 될텐데, 소화의 어느 단계부터 햄버거가 아니라 나인가? 이런 논의를 하다 보면 결국 영혼이 있고, 육체는 변화하지만 영혼은 불변한다, (나는 영혼이다) 같은, 종교나 심신이원론의 결론 방향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현대 뇌과학과 심리철학은 '몸을 떠나 존재하는 나는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나와 몸은 하나다. 이제 존재론은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들뢰즈가 제시하는 새로운 존재론은 정말 기발하다.
임영웅이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수 많은 연습을 통해 완벽한 라이브 무대를 준비했다. 그가 이번 주에 부산에서 부른 그의 히트곡은 지난 주 서울에서 부른 히트곡과 완전히 같은가? 잘 생각해보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음파 분석기로 그 공연의 녹음 결과를 분석하면 두 곡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바이브레이션 한 개가 빠졌을 수도 있고, 0.01초 만큼 길 수도 있으며, 기타 반주의 음 한개가 이전 공연보다 조금 작을 수도 있다. 이 관찰은, 그래서 '반복하면 반드시 차이가 발생한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mp3은 어떤가? 예전에 mp3을 복사할 때 마다 음질이 떨어진다는 인터넷 밈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런 관점은 아니더라도 mp3도 반복할 수록 차이가 발생한다. 내가 독후감을 쓰면서 듣는 그 곡과, 출근을 하며 듣는 그 곡을 대하는 내 마음 상태는 완전히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반복하면 차이가 발생한다'는 명제는 디지털 매체를 대상으로 해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이제 그 비교의 대상을 나로 돌려보자. 1초 전의 나는 왼쪽 검지 손톱이 길었다. 또각. 1초 후 나는 그 손톱을 잘라냈다. 나는 1초 만에 나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손톱 만큼의 차이가 있는 '내'가 생성되는 것이다. 즉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기가 막히지 않는가?
그리고 이 '차이의 존재론'은 그냥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의 수준에 머물고 끝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 통찰을 윤리학, 정치학, 미학으로 확장한다. 들뢰즈에게 존재론은 형이상학의 무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들뢰즈는 적극적으로 현실의 논의에 존재론을 끌어 들인다.
이 책 <혁명의 거리에서 들뢰즈를 읽다>는 괜찮은 들뢰즈 입문서다. 들뢰즈를 이야기할 때 빠져서는 안되는 그의 철학 꼭지들을 빠짐 없이 설명하면서, 그의 생애와 저서들에 대해서도 쉽게 이야기한다.
단점이 하나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김재인 교수님은 대치동 스타 논술강사 출신이다. 그래서 그런지 어조가 다소 (불편할 정도로) 단정적이다. 또한 김재인 교수님은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들뢰즈를 읽고 싶어 하시는데, 들뢰즈를 주로 니체적으로 설명하는 이진경 교수님에 대한 공격이 들어 있어, 이진경 교수님을 좋아하는 사람은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만약 이 책으로 들뢰즈를 입문할 생각이 있는 분이 있다면, 앞 부분 부터 읽기 보다는 뒷 부분 부록부터 읽기를 권한다.
올해, 늦어도 내년엔 들뢰즈의 주저들을 읽기 시작할 것이다. <차이와 반복>으로 시작할지, <니체와 철학>으로 시작할지는 아직 못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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