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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04. 2023

포스트 구조주의 입문

<현대사상입문>,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입문> 완독, 더워서 산책을 나갈 수 없는 점심시간에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때우며 후기를 남긴다. 제목에는 ‘입문’이 들어 있지만 이 책은 한국에 드문 중급서로, 후기가 평소보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물론 최선을 다해 쉽게 쓸 것이다) 


제목은 <현대사상입문>이지만, 이 책은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한 책이다.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이름이 이미 무시무시한데(차라리 현대사상이 친숙해 보인다), 사실 알고 보면 제목만큼 그렇게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오늘은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해 조금만 써 보겠다. 포스트post는 ‘~의 이후’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이니,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주의 이후’라는 뜻이다. 그러니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일단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구조주의는 철학사조라고 얘기하긴 좀 어렵다. 구조주의는 1910년대 언어학에서 시작되어 1900년대 중반 유럽 인문학, 사회과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친 철학적 경향이다. (철학적 태도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구조주의의 주장을 아주 단순화하면 ‘인간의 정신, 언어, 문화의 배후에는 보편적, 무의식적 구조structure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는, 인류는, 그리고 인류의 문화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구조의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주장이다. 


구조주의는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 있는 인간의 정신, 언어, 문화의 구조가 똑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개별 인간의 사유 방식은 그 나름대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 구조 속에서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반공이 구조로 대한민국을 지배하던 70-80년대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어떤 소년의 외침은 애국적, 자유적, 보편적 가치를 지닌 말이었지만 현대의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예는 좋은 예는 아닌데, 짧고 쉽게 설명하는 다른 예제를 못 찾았다


구조주의가 어떤 주장을 하는지 대충 알았다면 이제 포스트 구조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된 것이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입장으로,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포스트 구조주의가 구조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구조주의를 계승하지만 다른 점에서는 비판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포스트 구조주의가 구조주의로부터 계승하는 것은 방법론이다. 구조주의는 언어학으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구조와 더불어 언어를 사유의 도구로 삼는다. 구조주의는 인간의 정신, 사회 현상, 권력의 구조를 인간의 언어와 구조를 통해 분석한다. 그리고 구조가 시대와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의 정신과 문화를 안정적으로 지배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주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구조주의는 모던의 시대에 속해 있다. 즉, 구조주의는 이데아의 위치에 구조를 놓는다. 


반면 포스트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던에 속해 있다. 포스트모던은 이데아를 중심으로 한 플라톤적인 이분법 사고를 거부한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 마나님과 김치찌개를 먹으며 나눈 에피소드로 남겨 놓겠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언어와 구조를 통해 인간과 문화를 분석하는 방법론적 측면은 같으나, 그 결론이 다르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구조의 완전함과 안정감을 부정한다. 포스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있지만, 그 구조는 불안정하며 한계를 가지고 있다. 


포스트모던의 기본적인 사고 방식은 플라톤주의에 입각한 이분법적 사고에 저항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상정한 다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불완전하고 무질서하고 변화하는 임의적 세계라고 선언한 이래, 서양철학은 늘 이러한 이분법의 창으로 세상을 해석해왔다. 이데아의 위치에 놓인 것이 바뀌었을 뿐, 교부철학의 신, 데카르트의 이성, 하이데거의 존재, 마르크스의 계급, 그리고 구조주의의 구조까지 실은 2천년 서양철학은 늘 플라톤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 2천년의 역사는 모두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던이 해체하려는 것이 바로 이 플라톤주의 이분법이다. 이분법은 그저 이분법에 끝나지 않고, 위계와 차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생각이다. 즉 이데아-세계, 신-인간, 이성-비이성은 물론이고, 남자-여자, 서양-동양, 백인-유색인, 정상인-장애인처럼, 플라톤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정상에 가까운 것을 우수하고 선한 것으로, 정상에서 먼 것을 열등하고 악한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생각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은 이 이분법을 거부한다. 이 책의 작가 지바 마사야는 구조주의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거부를 포스트 구조주의의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라고 말한다. 


‘이항대립의 탈구축’이라니 역시나 말이 좀 어려운데, 지바 마사야의 의도는 이러하다. 이항대립은 ‘두개의 항목이 대립하는 것’으로 결국 플라톤주의를 말한다. 그리고 구조주의가 ‘구조’를 중심으로 한 이항대립을 ‘구축’했다고 상정한다. (그냥 표현이 어려울 뿐,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구조주의는 이데아의 위치에 ‘구조’를 놓았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포스트 구조주의의 목표는 구조주의가 상정한 ‘구조’중심 이항대립을 ‘탈구축하는 것’이라는 것이 작가의 주장이다. 


‘탈구축’은 영어로 디컨스트럭션deconstruction이고, 프랑스어로는 데콩스르뤽시옹déconstruction으로, 데리다의 용어다. 탈구축이란 사물을 이항대립, 즉 두 개념의 대립에 의해서 파악하여 좋고 나쁨을 말하려는 것을 '일단 유보'한다는 태도다. 다시 말하면 이항대립적 판단 요청을 거부하겠다는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서 구조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겠다는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의 전략이다. 


레이냐 아스카냐? 이 질문에 섣불리 대답하기 전에 왜 미사토나 리츠코, 마야는 안되는가? 하고 묻는 것이 포스트 구조주의적 태도다. 이렇게 물으면 레이와 아스카 답은 둘 중 하나 뿐이라는 질문자의 질문 구조, 즉 의도가 드러난다. 이 질문은 불완전하다. 에반게리온의 여성 캐릭터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포스트 구조주의는 탈중심적이다. 포스트 구조주의는 중심과 정상의 위계를 거부하고, 다양성과 변동성, 그리고 개별 요소들의 차이를 중요시한다. (이것은 포스트모던 전체의 경향이기도 하다) 


지바 마사야는 이렇게 명쾌하게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를 구분한 후(명쾌하지 않았다면 나의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시 포스트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세 철학자, 데리다, 들뢰즈, 푸코를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에 의하면 데리다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개념’을, 들뢰즈는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는 ‘존재’를,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사회’를 포스트 구조주의적으로 탈구축했다는 것이다. 이 개별 철학자들에 대해 쓰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므로, 이 뒷얘기가 궁금한 분은 이 책, <현대철학입문>을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사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를 이렇게 나누는 것은 명쾌하긴 하지만 엄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는 어떤 스펙트럼이지, 누구 한 사람의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명쾌하게 나누고 보니 정말 읽기 어려웠던 데리다와 들뢰즈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한국에는 인문학 중급자를 위한 책이 참 드물다. 아예 인문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아주 쉬운 입문서(지대넓얕 같은)가 아니면, 전공자 수준의 지식을 이미 쌓은 사람을 위한 고급서(전문서)뿐이다. 나처럼 취미로 읽는 취미 독서가를 위한 책은 만나기가 무척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정말 소중했고, 한 장 한 장 아껴가며 읽었다. 260페이지에 불과한 책에서 뽑아낸 흥미로운 문구들이 30개가 넘는다. 


정말 재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내가 클럽장으로 있는 트레바리 클럽 [인생에 보탬은 안되지만] 주제책으로 선정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인문학/과학 분야의 입문 수준 책을 읽는 우리 클럽의 수준은 살짝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인문학을 가끔 읽어 오셨던 분들께는 강력하게 추천한다. 올해 읽은 책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또 한 가지, 단 하나의 패러다임을 정상과학으로 인정하고 과학의 발전을 패러다임 사이의 단절로 이해하는 과학적 상대주의에 대해, 여러 과학적 실천 체계를 유지 발전시키자는 과학적 다원주의를 제안한 장하석 교수님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는, 모더니즘적 세계관에 맞서 포스트 구조주의적인 과학철학의 입장을 정리한 책이었다는걸 이 책을 읽고 깨달았는데, 이 얘긴 다음 기회에 정리해 보겠다. 


흥미로운 문구들과, 본문 이해를 돕기 위한 다른 글들을 아래에 링크한다.


TMI: 레이와 아스카의 예제는 이항대립의 탈구축의 예제로 내가 가져온 것으로, 지바 마사야가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정답은 물론 아스카다)




https://brunch.co.kr/@iyooha/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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