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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균 Oct 25. 2023

철학자들의 문체

철학서를 읽는 다른 재미

최근 읽고 있는 책은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이다. 




<소유냐 존재냐>,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자유론> 같은 완전 대중서를 제외하고, 철학자의 본격적인 1차 저작으로 지금 읽고 있는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은 네 번째 책이다. 앞서 니체의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니체가 쓴 <선악의 계보>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하면 어떨까?" 정상 해석은 아니지만, 5분 뚝딱 철학의 김필영 박사님은 "진리가 여자라면 심각하고 심오한 척 하며 무겁고 어려운 철학자들을 싫어하지 않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니체는 철학은 좀 더 가볍고 경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신다. 나도 동의가 된다. 


니체의 문체는 문학적이다. 니체는 스스럼 없이 비유와 은유를 가져온다. 깊은 논증을 하다 말고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고, 수십수백개의 해석을 가질 수 있는 잠언을 가져다 붙인다. 그래서 니체는 읽으면 그냥 읽을 수 있다. 어려운 단어나 긴 문장이 없다. 그런데 반대로 읽고 나면 "내가 생각한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내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 니체가 의도한게 이게 맞나?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를 읽으면서는 역자의 해제나 주석을 꼼꼼히 읽을 수 밖에 없다. (사실 박찬국 교수님이 없었다면 니체에 대한 정상해석을 똑바로 읽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교수님의 번역서에는 정말 꼼꼼하게, 오해를 피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석이 달려 있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니체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여전히 니체를 우생학 지지자로, 나치의 부역자로 생각하고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푸코는 전혀 다르다. 푸코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푸코는 장章 안에서, 절節 안에서, 계속 동어 반복을 한다. 같은 명제를 말하고 또 말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고, 하나는 깊이를 더 하기 위해서다. 


푸코의 논증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자 봐, A야. A는 이런거야. 그런데 A를 이렇게 살펴볼 수도 있어. 혹시 A'라고 생각했어? 그거 아니야. A'아니고 A야. 푸코는 독자의 오독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텍스트 안에서 무진 애를 쓴다. 


그래서 푸코는 거듭 읽고 이해가 안되면 "아, 내가 이해를 못한거구나" 하고 넘어갈 수가 있다. 

최소한 "아마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뜻이겠지?" 하고 오해하고 넘어갈 가능성이 없다. 


니체의 본문에, 조금 과장하면 절반 수준 분량의 주석을 달아 놓는 박찬국 교수님과는 달리, 푸코를 번역한 이규현 번역가는 푸코 본인이 달아 놓은 주석을 제외하고 역자주석을 거의 달지 않았다. 그만큼 푸코는 명백하다. 


앞으로 다른 철학자들의 1차 저작들도 만나게 될거다. 당장 내년엔 칸트와 헤겔이 기다리고 있고, 언젠가는 라캉과 레비나스의 1차 저작도 읽을 계획이다. 아마 다들 다른 문체를 가지고 있겠지. 어떤 스타일로 글을 쓸까? 이것도 철학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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