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어느 날의 기억
아이들이 느즈막히 일어난 주말 오전, 아침 겸 점심으로 밥을 차리려는데 냉장고 상태가 애매하다. 새로 반찬을 큰 걸 해서 주기엔 너절한 반찬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밥솥에 남은 밥도 새로 하기엔 너무 많았다.
남은 반찬 중 가장 큰 것이 소불고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갑자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제는 다니시지 않지만, 내가 어렸던 시절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취미는 낚시였다. 다니시던 회사 낚시 대회 입상 트로피가 집에 두 개나 있었다. 대개는 혼자 다니시던 낚시터에 봄 가을에 한 번씩 가족들을 데려가셨다.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아서 한칸 반짜리 짧은 낚시대를 드리워 놓고 숨죽여 붕어를 기다렸다. 붕어나 미꾸리가 찌를 툭, 치고 가기만 해도 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랬다. 낚시대를 잡으려는 내게 아버지는 대를 잡으면 네 심장소리가 붕어한테 들리니 잡지 말라고 하셨다. 어린 조사는 대개는 하루 종일 한 마리도 낚지 못했고, 운이 아주 좋은 날엔 두세마리를 낚았다.
아버지는 늘 저수지로 가는 차 안에서 오늘 점심은 붕어 매운탕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셨지만, 점심 시간에 아버지의 낚시망에 들어 있는 것은 대개 미꾸리 한두마리 뿐이었다. 물고기는 수면이 뜨거워지는 점심 나절엔 저수지 밑바닥에서 잘 올라오지 않는다. 아버지 혼자라면 밤에 출발하셨겠지만, 초등학생을 깨워 출발하면 해가 한참 뜬 다음에야 저수지에 도착하기 때문에 모 은행 낚시 챔피언인 아버지라고 해도 붕어를 낚을 기회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점심이 되면 어머니는 준비해오셨던 반찬을 꺼내셨다. 점심은 메뉴는 대개 불고기였는데, 어머니는 은색 코펠 그릇에 쌀밥을 담고, 불고기를 얹어 내게 주셨다.
그리고 오후가 지나고 낚시가 끝나갈 때 즈음, 어머니는 버너에 다시 불을 붙이셨다. 점심에 먹고 남은 불고기에 그 날 가져간 콩자반, 멸치조림 같은 밑반찬들을 몽땅 털어 넣으셨다. 남은 김치도 썽둥썽둥 잘라 넣고, 마지막으로 불을 끈 다음 찬 밥을 큰 코펠에 넣어 비볐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낚싯대를 앞에 놓고 먹었던 이 불고기 잡탕밥의 맛을 나는 늘 잊을 수가 없었다. 언제든 그 장면을 떠올리면 그 맛이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이를테면, 내 유년시절의 소울푸드의 맛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어머니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셨을 것이다. 뭐 대단한 요리를 하셨다기 보다는, 음식 남은 것을 싸가기도 애매하고, 낚시터에 버리고 올 수도 없고. 이제 집에 돌아가면 피곤하니 따로 밥상 차리기 귀찮을 것 같고. 남은 음식 처리도 할 겸, 저녁도 좀 때울겸, 그렇게 생각해내신 저녁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요리는 그 이후 40년 동안 아들의 소울푸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열어 놓고 내가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는 사이, 아들이 다가와 오늘 아점은 뭐냐고 묻는다. 그래서 아들에게 되물었다.
"아빠 소울푸드 한번 먹어볼래?"
눈을 껌벅거리는 아들에게 냉장고에서 꺼낸 불고기 그릇을 들고 있으라 시키고, 밑반찬 몇 개와 김치가 든 락앤락을 꺼내와 가스 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아들은 내가 뭘 만들지 궁금한지 내 옆에서 내가 어머니의 낚시터 소불고기 잡탕밥을 재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간을 보려 한 입 먹어보고는 나는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내가 기억하는, 기억속에 있는 그 맛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하긴 불고기에 김치를 썰어 넣고 밥을 비볐을 뿐이니 상상이 어렵지 않기는 하겠다)
완성된 낚시터 잡탕밥을 함께 먹으며 이 이야기를 해주고는 아들에게 미래의 소울푸드가 무엇이 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아들은 예상한 대로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할 것이다. 무엇이 소울푸드가 될지는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 알 수 있을 것이다. 다 크지도 않은 손으로 코펠 그릇을 잡은 채 석양이 떨어지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던 유년 시절의 나는, 50살이 되어 내가 그 맛과 요리를 재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사족: 사진이 없는 것은, 사진을 찍었으나 비주얼이 매우 비참했기 때문이다. 낚시터 잡탕밥의 비주얼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https://blog.naver.com/iyooha/2229429306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