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중천을 걷다 칸트를 이해한 순간
점심시간에 운중천을 산책하다가 문득 다리 밑에서 걸음이 멈춰져버렸다.
칸트의 관념론은 대상과 표상을 구분하면서 시작한다. 나의 바깥에 있는 나무는 내 시각과 청각과 촉각과 후각을 통해 내게 들어온다. 나는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 흙냄새와 더불어 갈색과 고동색 줄기와 가지, 나뭇잎이 어우러진 나무를 전체로서 느낀다. 내 감각에 의해 분해되었던 대상은 내 안에서 표상으로서 다시 조립된다.
하지만 나는 유니콘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유니콘을 경험한 적이 없지만 아주 쉽게 뿔 달린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표상은 대상을 필요 조건으로서 요청하지 않는다.
<순수이성비판> 초반 감성론에서 통각 개념을 이야기하며 자기 의식이 있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던 칸트는 마지막 부분 변증론에서 돌연 감성론을 뒤집는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나를 호되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 질문은 이러하다. 나무를 바라보는 나, 그 나를 나는 실체로서 경험하는가?
나는 나를 볼 수도, 만질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다. 순식간에 놀라운 것을 깨닫는다. 나는 유니콘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사랑이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민주주의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처음부터 실체로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놀랍게도 개념에, 그러니까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왜 이 당연하지만 엄청난 것을 <순수이성비판 서문>을 읽을 때는 깨닫지 못하고, 산책을 하다 문득 이해하게 된 걸까. 무의식은 정말 놀랍구나. 나는 의식적으로는 다른 일을 하는 동안에도, 무의식 수준에서는 내내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왔을 것이다.
추가) 양치를 하면서 또한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없고 존재하는 것은 감각의 다발'이라는 흄을 읽고 칸트가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고 한게 이 포인트였겠구나
추가) 그리고 동시에 문득 떠오른 질문: 대상에게는 있고 이데올로기에는 없는 것이 바로 '존재'라면 하이데거의 연구는 이 곳이 시작점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무진장 궁금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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