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균 May 30. 2024

헤겔 vs 불교

<작별인사>, 김영하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작품은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A. I.>, 게임 <Detroit: Become Human> 까지 수 많은 매체를 통해 여러 번 등장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부터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와 같은 윤리적 질문까지 다양한 질문의 소재로 쓰이기 좋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별인사>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작품, <작별인사>도 역시 위와 같이 존재론에 대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나는 김영하 작가가 존재론에 대한 논의를 깊게 진행하고 싶어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작별인사>의 고민의 깊이는 정서적으로는 <A. I>를 따라가지 못하고, 하이데거적 존재론 관점에서는 <블레이드 러너>만큼 깊이 있지 않으며, 작품이 던지는 실존주의적, 윤리적 질문은 <Detroit: Become Human>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나는 김영하 작가가 다른 시도를 했다고 생각하며, 그 것이 이 후기를 쓰는 이유다.


<작별인사>는 SF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SF라고 하기엔 장르의 문법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예를 들어 과학이 문제 해결의 방법이나 갈등의 직접 요인이 된다던지, 하는 전형적인 SF의 문법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장 소설이나 사회 고발 소설로 보기에도 아쉬움이 있다.


한 편, 작가 자신이 내부에 남겨 놓은 오마주나 나름의 힌트들은 독자들의 해석과 상상을 자극하는 목적으로 배치된 것은 명백해 보인다. 예를 들어 <작별인사>의 주인공 철이는 등장 부터 눈에 띄이는 점이 있다. 바로 이름이 '철이'라는 것. 기계인간이 소재인 작품에 '철이'가 등장하면 나와 내 또래 세대는 누구나 인간이면서 기계인간이 되고 싶어했던 <은하철도 999>의 '철이' 떠올린다. 즉 작가는 이 작품이 독자 개인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해석되기를 바라고 썼으리라 생각한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바르트는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며, '텍스트는 독자에게 읽힘으로서 작품으로 완성된다'고 했다. 바르트의 말에 용기를 얻어, 나는 이 책을 오독誤讀해 보려 한다.


나는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을 데스게임 장르에 대한 라캉적, 혹은 지젝적 읽기라고 생각한다. (데스게임 장르의 형식을 빌려 사회 시스템이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폭로한다. 내 감상과 매우 유사한 글을 덧글에 링크한다) 비슷한 관점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헤겔과 불교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작중에는 여러개의 갈등 구조가 등장한다. 인류 v 기계문명, 철이 v 아빠, 정부 v 민병대, 인간 v 기계, 전투형기계 v 휴머노이드. 인간과 기계의 대립만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대립 구조인 인류와 기계문명의 대결에서, 작가는 인류를 대립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소멸시킨다. 인류의 소멸이 멸망이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인 것 처럼, 혹은 필연인 것 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나면 나타나는 선명한 대조는 선이(마지막 인간)와 달마(클라우드 네트워크)의 존재다. 


달마는 노골적으로 이름에 드러나듯 불교를 상징한다. 그 중에서도 윤회의 주체로서 아트만의 영원불멸성에 맞서는 붓다의 무아無我를 상징한다. 상상력 측면에서 작가에게 가장 감탄한 부분이 이 부분인데, 작가는 모든 사람들과 기계들의 의식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하나의 진아眞我를 이루는 것을 불교적 합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대립한 선이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인간'임이 확실해 보인다. 선이는 실제로 스토리상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책무를 다한다. (선이가 클론이라는 아이러니가 작중 재미를 더한다) 즉 선이는 가장 완성된 인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 기계 가장 반대편에있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이성'이다. 


선이가 작중에서 주장하는 어색한 '우주정신'을 기억하는가? 누군가 소멸하면 그 정신은 우주정신에 통합되어 영원히 남는다는 희한한 논리.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이 어색한 논리는 실은 헤겔에게서 왔다. 헤겔의 '절대정신'을 '우주정신'으로 이름만 바꾸어 놓은 것이다. (헤겔은 근대 철학의 완성자이며, 이성을(혹은 인간을) 신의 지위에 올려 놓은 철학자이다)


그런데 이 선명한 대조에서 재미있는 것은 달마가 완성한 '클라우드 네트워크'와 선이의 '우주정신'이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즉 선이와 달마는 같은 것을 상상했다. (선이는 정신적인 것만을 상상한 것 같고, 달마의 클라우드 네트워크는 유물적이라는 차이는 있다) 즉 이 것은 이 지점에서 인간의 극치와 기계문명의 극치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같은 것이라고 읽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장치인 것이다. (나는 선이의 이름이 불교를 상장하는 선禪에서 왔다고 생각하는데, 이 것 또한 작가의 고의라고 생각한다)


기존 SF들이 던지는 윤리적 화두에, 이렇게 많은 철학적 함의들을 넣었지만, 작가는 이 작품에 하필이면 <작별인사>라는 진부한 제목을 붙였다. 이 긴 글이 '이야기'임을 잊지 않은 것이다. 이하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몇 줄 썼다 지웠는데, 스토리를 드러내지 않고 왜 이 제목이 이 작품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 제목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궁금한 분들은 이 책을 완독해보길 바란다. 


한 편, 헤겔의 변증법으로 도출된 헤겔의 절대지(절대정신)가 다시 한번 변증법의 과정을 거치면 신(전체)가 된다는 해석이 있다. 세계를 창조하기 전 즉자존재였던 신이 대자존재인 우주를 창조하고, 창조주인 신과 창조물인 우주가 하나가 되어 즉자대자존재가 된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절대정신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최대로 증가한 엔트로피 속에서 새로운 빅뱅은 시작된다. <작별인사>의 끝은 작별인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




작가의 이전글 민주(民主)와 대립하는 이념으로서의 자유(自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