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관리되어야 하는 인적 자원이 아니다... 관리해야 할 것은 일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 차이는 무척 크고 중요하다."
- 찰스 핸디,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인적 자원(Human Resources)'이라는 말이 한때 널리 쓰였고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정책으로 인적 자원 개발에 사활을 걸었고, 학교 교육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했다. 그래서일까?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조차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되어서인지 지금도 교감, 교장을 '관리자'라고 부른다. 핵심 자산이 유능하거나 숙련된 인력인 조직, 즉 대학과 극단, 법률회사와 교회에서는 책임자를 지칭할 때 '관리자manager'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을 대학에서는 학장, 법률회사에서는 대표, 교회에서는 단장이라고 부른다.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의 저자 찰스 핸디에 따르면, 관리자라는 직함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을 담당하는 사람에게만 사용된다. 그런데 왜 학교에서는 여전히 '관리자'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걸까?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관리'라는 단어는 사람이 자원, 즉 다른 사람에 의해 통제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학교에서 교감, 교장을 '관리자'라고 부르는 것은 교사들을 통제돼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교사 개인의 전문성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이들을 관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모순이다.
학교뿐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회사, 조직에서 책임자들은 '관리'의 관점에서 직원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물건처럼 필요한 곳에 배치되었다가 적절할 때 사용되고, 필요 이상으로 남는다 싶으면 줄일 수도 있는···. 그래서 일터가 비정하고 불행한 곳이 되곤 한다.
나 스스로 '인적 자원'을 넘어서는 존재가 되고, 다른 사람을 '관리'의 관점으로 보지 않을 방법이 무엇일까? 찰스 핸디의 책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조직원들이 어떤 일을 언제까지 어떤 기준에 맞추어 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 그 일이 유용하거나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면, 누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 일을 해낼 것이다."
라고 했다.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해 주고, 적절한 사람들을 뽑아 각자에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을 충족한 경우에 보상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비전과 철학을 공유하며, 개인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흔히 '비전'이나 '철학'은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기 십상이며, 개인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발휘하라고 하면서도 환경이 조성되지 않거나 그에 따른 보상이 적절치 않을 때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리더십과 참여가 필수적이다. 구성원 간에 역동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할 맛 나는 직장'에서 개인의 성장과 조직의 성장이 동시에 가능하다. 우리네 일터가 시키는 것만 최소한의 범위에서 마지못해 하는 곳이 아니라 성장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주의: 성장의 기쁨을 느끼라며 충분한 보상도 없이 열정 페이 요구하는 일터는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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