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한복판에 자리한 B백화점은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이제는 침체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고급스러운 외관은 여전했지만,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온라인 쇼핑의 급성장은 오프라인 쇼핑의 매력을 무너뜨렸고, B백화점의 매출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백화점 회의실에서 차기 CEO이자 현 회장의 장녀인 소성민 대표는 비서가 전달해 준 편지를 바라보고 있다. 조심스레 소대표는 편지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어 본다.
사랑하는 성민아,
세월이 참 빠르구나. 네가 어릴 적 내 손을 잡고 이 백화점의 복도를 걸었던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네가 이곳을 책임지는 대표가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네가 어렸을 때, 나는 너를 이곳에 데려오면 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백화점 곳곳을 누비던 네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때 너는 가끔씩 내게 "아빠, 나도 나중에 여기서 일할 수 있을까?"라고 묻곤 했지.
우리 백화점은 한때 누구나 오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북적이던 곳이었지. 그 화려한 전성기를 함께 누비던 그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오르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우리 백화점은 매우 어려어 상황인 것 같아. 지금 네가 맞서고 있는 어려움들을 생각하면, 아버지로서 참 미안한 마음이 크다. 네가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어. 백화점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아빠는 누구보다 잘 이해한 단다.
하지만, 성민아. 네가 아무리 큰 책임을 지고 있다 하더라도,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최근 네가 얼마나 바쁘고 힘든 일정을 보내고 있는지 듣고는, 내 마음 한구석에 걱정이 자리 잡았다. 백화점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네 헌신은 자랑스럽지만, 건강을 잃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민아, 아빠는 네가 어려운 시기를 잘 극복하리라 믿는다. 네가 가진 끈기와 지혜는 이 위기를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 누구도 너처럼 이 백화점을 잘 알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단다. 그리고 네가 어릴 때 이 백화점을 사랑했던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이끌어 나갈 거라 믿어.
너는 나의 자랑스러운 딸이자, 이 백화점의 미래야. 아빠는 언제나 네 옆에서 널 응원할 거야.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나면, 더 큰 성취와 보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때 가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환한 미소로 백화점을 둘러보며 그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항상 몸 건강하게, 마음의 여유도 잃지 말고, 너 자신을 믿고 나아가길 바란다. 아빠는 너를 믿어. 그리고 네가 나보다 더 찬란한 백화점의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을 믿는다.
사랑하는 아빠가.
눈물이 흐르기 전에 소성민대표는 애쓴 웃음으로 눈물을 멎었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선 당당한 자신을 보습을 점검하고 백화점을 둘러보러 나섰다.
김상무는 백화점 로비에서 사람 없는 한산한 매장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찾으며, 옥상 계단으로 올라가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김 상무님!" 그녀는 냉정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연봉 주려고 우리 백화점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연봉만큼 일하라고 그 자리에 둔 거죠!”
소성민 대표는 뛰어난 외모와 능력 모두에서 빛을 발하는 인물이었다. 예리한 비즈니스 감각과 타협을 모르는 태도에 직원들은 그녀를 두려워했다. 김상무는 그녀의 질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소대표님,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김상무는 힘겹게 대답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회의실을 나와 1층 로비에 서 있던 김상무는 한참 동안 백화점 전경을 바라보며 예전의 붐비던 시절을 떠올렸다. 매일매일 줄어드는 고객의 발걸음에 무기력함을 느끼던 그때, 한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김 상무님." 그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저는 THE PROGRAM의 대표, 김민철입니다."
김상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생소한 이름에 의심이 들었지만, 김민철의 자신감 있는 태도는 그를 멈칫하게 했다.
"요즘 온라인 시장의 성장으로 인해 오프라인 매출이 많이 떨어졌죠." 김민철은 말을 이어갔다.
"저희 THE PROGRAM이 한 달 만에 매출을 10배로 올릴 수 있는 제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상무는 처음엔 그를 무시하려 했다. '이 미친놈은 뭐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마침 건너편에서 소성민 대표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이 김상무를 향하고 있자, 그는 급히 김민철에게 다시 돌아섰다.
"지금 바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김민철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안서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김상무는 망설이지 않고 그를 회의실로 데려갔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김민철은 차분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제안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 일주일! 10배의 매출을 올려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진행하는 세 가지 ACTION PLAN만 허락해 주시면 됩니다. 모든 방법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김상무는 그의 과감한 제안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 세 가지가 뭔데요? 그렇게 쉽다면 이미 다른 데서 했겠죠?"
김민철은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설명했다.
"혹시 1995년에 스위스 생물학자 클라우스 베데킨트(Klaus Wedekind)의 '티셔츠 실험' 들어보셨습니까? 이 연구는 후각이 유전적 상호 보완성을 인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간단히 말해, 특정 유전자에 기반한 향이 사람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죠."
김민철은 이어서 세 가지 전략을 요청했다.
"첫째, VIP 고객을 위한 무료 미용 이벤트를 여십시오. 둘째, 백화점 내 음악과 향기는 저희가 정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직원 대응 커뮤니케이션은 저희가 교육하겠습니다."
김상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들이 매출을 올릴 수 있다고요?"
김민철은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모든 전략은 과학적 이론과 임상 결과에 기반한 것입니다. 성공을 보장합니다."
김상무는 고민에 빠졌다. 그의 직감은 김민철의 제안이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믿음이 갔다. 무엇보다도 소성민 대표의 질타를 다시 받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B백화점은 새로운 이벤트를 기획했다. 주요 VIP 고객들을 위한 무료 미용 행사가 바로 그것이었다. 김민철은 이 행사를 통해 고객의 유전자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활용해 소비 욕구를 자극할 계획을 세웠다.
행사 당일, 백화점 내 미용실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로 꾸며졌고, VIP 고객들이 초대되었다. 무료 헤어 스타일링과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고객들은 기쁘게 행사에 참석했다.
미용실에서 고객들은 편안하게 서비스를 받으며, 머리카락을 자르고 스타일링하는 과정에서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카락샘플을 저희가 보관해도 괜찮을까요? 샘플을 통해 저희가 더 세심하게 관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미용사가 자연스럽게 물었고, 고객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이 더 큰 계획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김민철은 미용 과정에서 수집된 고객의 머리카락을 통해 유전자 정보를 분석했고, 이를 바탕으로 각 고객에게 최적화된 페로몬을 제작했다. 그 페로몬은 백화점 곳곳에 설치된 디퓨저를 통해 퍼져나갔다.
동시에 백화점 내에 흐르는 음악에는 특정 주파수가 섞여 있었다. 이 주파수는 고객들의 뇌의 편도체를 자극해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고, 고객들은 더 충동적으로 소비를 하게 되었다.
백화점 전체에 흐르는 음악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그 안에는 고객들의 감정을 조작할 수 있는 미세한 기술이 숨겨져 있었다.
"이 음악, 듣기 좋지 않아요?" 한 고객이 다른 고객에게 말했다.
"네, 기분이 정말 좋아지는 것 같아요." 다른 고객도 동의했다.
고객들은 자신들이 무언가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달랐다. 더 많은 물건을 사고 싶어 졌고,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명품을 구매하게 되었다.
김민철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고객들은 백화점에서 제공하는 상품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소비 욕구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어수룩한 옷차림의 한 부부는 화려한 백화점 인테리어를 처음 보는 것처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대체 이런 비싼걸 사람들은 얼마를 버는 거야? 우린 사지도 않을 건데 빨리 나가자 ”라며 남편이 구시렁거렸다.
“여보~ 저기 가방매장 딱 한번 구경만 하자! 안 사줘도 좋으니까 나 정말 구경만 하고 싶어!”라고 아내가 간절히 부탁한다. 이에 남편은 구경만 하는 거라며 단호하게 말하고 매장에 들어선다.
"여보, 이 가방 어때?" 한 중년 여성이 남편에게 명품 가방을 들어 보였다.
남편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남편은 안내해 주는 매장 직원과 몇 마디 나누더니 카드를 꺼내어 지불한다. 이에 아내는 너무 놀라며 고마움에 남편이 팔을 꼭 껴안는다.
백화점에서 산 명품가방을 아이처럼 가슴에 안고 집에 돌아온 그 여성은 한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메시지에는 'THE PROGRAM: 환경은 인간을 만듭니다.'라는 배경음악과 함께 그녀와 남편이 쇼핑을 하며 행복해하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또 하나의 문자가 도착했다.
"THE PROGRAM의 비밀을 꼭 지키셔야 합니다. 누설 시 가족에게 먼저 통보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당황했지만, 온라인에서 우연히 광고를 보고 누른 그때의 광고문구가 기억이 났다.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던 이뤄드립니다.”라는 광고문구를 클릭하고 남편의 머리카락 샘플을 THE PROGRAM이라는 회사에 보냈다.
생각해 보니 오늘 백화점 직원의 행동이 생각났다.
"백화점 직원이... 조금 이상했어." 그녀는 잠들기 전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명품 가방을 구매할 때, 직원이 남편을 향해 무시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고객님, 이 제품 말고 다른 저렴한 제품 어떠세요?"
그 말은 남편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듯한 말로 백화점 직원 같지 않은 말투로 연이어 남편을 공격하는 듯했다.
"이걸로 주세요!" 남편은 화를 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명품 가방을 손에 넣었고, 오랜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B백화점의 매출은 김민철의 계획대로 급상승했다. 이에 김상무는 소성민 대표에게 큰 감사의 의미로 외제차까지 선물 받았다. 김상무는 그 성과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는 고민에 빠졌다.
김상무는 백화점 내 고객들의 행동을 분석하던 중 THE PROGRAM의 방법이 윤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음을 깨달았다. 고객의 유전자 정보를 활용해 구매 욕구를 조작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이건... 너무 위험해." 김상무는 고민 끝에 대표인 소성민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소성민 대표는 매출 상승의 성공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왜 이 문제를 이제 와서 언급하는지 소성민 대표는 김상무의 순수한 의도보다는 백화점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이슈로 추후 자신을 협박할 수 있다라고 오해로 받아 드렸다.
"김 상무님, 이 방법이 성공적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왜 지금 이제 와서 이문제를 저에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상무는 소대표에게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우려를 떨칠 수 없었다.
김상무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 끝에 THE PROGRAM의 비밀을 방송에 폭로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B 방송국의 박기자와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했다. 백화점의 비윤리적인 영업 행태를 고발하기 위해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 시간이 한 시간이 지나도 김상무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박기자는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어 음성메시지로 넘어갑니다."라는 안내만 들려왔다.
다음 날, C 방송국 뉴스에서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대한민국 기러기 아빠들의 외로움"이라는 타이틀로 기자가 말했다.
"여기는 강남의 한 아파트입니다. 며칠째 출근을 하지 않은 직장인이 있어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실내로 들어가자 악취와 함께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6년째 기러기 부부로 살던 남편이 외로움과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상무의 결심은 무산되었고, THE PROGRAM의 비밀은 다시 어둠 속에 묻혔다.
THE PROGRAM은 백화점 내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소성민 대표와 김민철은 파트너십을 맺고 해외 진출이라는 큰 비전을 품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