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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Feb 29. 2024

05-230526

Cocktail Blues

내가 기억하는 내 우울의 첫인상은 '물'이었다. 아주 커다란 물. 아주 커다란 물방울이다가, 흐르는 강이 되었다가, 깊고 깊은 바다가 되기도 했다. 흐르지 못한 감정들이 쌓일 때마다 몸 안에서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우울이 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포근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주아주 깊은 바닷속을 -깜깜해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고래와 함께 천천히 걷고 싶었다. 아주아주 커다란 물방울 속에서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뭐든 다 괜찮을 것 같았다. 언제든 몸 안에서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주저 없이 동쪽으로 달려가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시 운전을 시작하고 싶을 만큼, 커다란 물은 위안이었고, 위안이다. 몸 안에서 찰랑이는 소리는 파도소리가 지워줄 것이고, 서걱서걱 밟히는 모래알들이 어두컴컴한 것들을 서걱서걱 잘라버릴 테고, 바람이 어질러진 마음을 슥슥 쓸어줄 테니까. 길을 걸을 때마다 굳이 한강다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한 발자국만 옆으로 가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운전자에 대한 미안함으로 누를 때마다 바다에 가고 싶었다. 내내 어떡하면 효과적으로 죽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던 녀석이 바다 앞에만 가면 순한 양이 되어 고요해졌다.

아주 커다란 물에 대한 마음을 슬쩍 꺼내본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그린 커다란 물방울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물방울을 그릴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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