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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21. 2024

생고기 구이와 소주를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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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가까이 겯고 틀던 사수와 오랜만에 저녁 한 잔을 했다. 사수는 -사수가 타고난 성별을 존중하여- 나에게 오리 아빠다. 무작정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작업실 한 켠을 내주고, 삐뚤어지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 주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 이름 뒤에 '글 쓰는 사람'이라는 부제를 붙여 소개했고,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을 다룰 수 있게 길을 틔워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영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사수 주제에 사수 머리 꼭대기에 앉을 때가 다반사였는데도 술 사주고 고기 사주며 앞서 걸어가고 있는, 고맙고 아름다운 분이다. 아무튼,

계절이 바뀌고 마음이 소란하여 오리 아빠에게 술이 고프다 칭얼거렸더니 친히 왕림하시어 집 근처의 고깃집에서 생고기 구이와 소주를 사주셨다. 처음 이 동네에 이사 왔을 때부터 다녔던 터라 고깃집 사장님은 어느덧 내 주류 취향을 알고 계셨지만 감히 "늘 마시던 거 주세요"라고 한 적은 없다.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알아서 내어 주시거나, 알아서 가져다 마시는, 그토록 돈독하고 애정하는 가게다. 아무튼,

둘 다 뱃가죽이 등가죽과 하이파이브를 할 만큼 굶주려 있었던 터라 숯불보다 뜨겁게 불판 위 고기만 바라보고 있었고, 고기가 익자마자 고깃집 주인님의 노고에 감사하며 먹기 바빴다.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다음 코스-라고 해봐야 먹던 대로 먹느냐 노선을 바꾸느냐에 대한 토론 거친 뒤-를 정하고 나서야 이야기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 다운이야기를 할 때, 자고로 고기는 마방진(?) 같은 진을 치고 있어야 제맛이다.


사부, 영상이나 이미지는 보자마자 감탄이든 욕이든 쏟아져 나오는데 텍스트는 아무리 기다려도 메아리가 돌아오질 않아요. 부담스러운 걸 아니까 주저하다 어렵게 부탁해도 도통 메아리가 돌아오질 않는다구요.


질문을 던진 사람은 나인데 사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건 나는 문과, 사부는 이과, 우리 사이에는 통역기가 필요했고, 어느 정도 술이 취하면 통역기고 자시고 지금 여기서 양자역학이 왜 나오느냐고 화를 내거나 지금 여기서 니체는 웬 말이냐고 화를 내거나... 바람 앞의 촛불처럼 파르르 떨다가 기승전대동단결. 사부와 나는 묻고 싶었던 것, 듣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말들을 고기와 된장찌개와 열무국수에 말아먹고 처음부터 만난 적 없었다는 듯 헤어졌다. 묻고 싶은 것은 묻어버리고, 하고 싶었던 말들은 삼키면 다음 작업 때 듣고 싶었던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마와요, 사부. 사부가 거느린 숱한 부사수 중에 한 명이겠지만, 그중 으뜸이라고 생각할게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한우 투뿔 1kg 사드릴게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 고기랑 술... 사주세요. 그래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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