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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Cocktail Blues

016 - 소박하다 1

Cocktail Blues

by 유정

한 번의 외출에 처리해야 할 일 여럿을 모으길 좋아한다. 하루종일 집에 있거나, 하루종일 밖에 있거나 다소 극단적인 일정을 좋아한다. 일이 듬성듬성 있을수록 마지막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신경써야 직성이 풀리는 지라 일이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있으면 스트레스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이고, 잠시나마 끄려면 극단적인 일정이 훨씬 효율적이다. 해서 지난 금요일에도 극단적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ㅇㅅ의 부탁을 처리하기 위해 영등포 신세계에서 시작한 일정은 집 근처 카페로, 고양이 돌봄을 위해 파리공원 근처로, 마지막 일정인 글짓기 수업 장소로 이어졌다. 고양이 돌봄이 예상보다 조금 늦게 끝나 수업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이 빠듯했다. 전화기 속 내비게이션을 켜서 거리와 제시된 소요 시간과 내 걸음으로 환산한 시간을 계산해 보니 딱, 연초 한 대 피울 시간이 났다. 그리고 마주한 강아지 한 마리.


IMG_8995.JPG 똘똘한 눈망울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멋진 강아지다


어쩌다 강아지가 있게 되었나 자세히 보니 미세먼지 알리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요즘 강아지는 공기질을 지키는 구나, 찰칵. 나라는 강아지-개띠라는 이유로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에 강아지를 대입하는 편이다. 어쩌면 "여름 개띠라 책임이 많다"던 할머니의 말이 주술처럼 작용하고 있는지도-는 무엇을 지키고 있나, 나를 지키기로 했었지. 서둘러 흡연장소를 향해 걸었다. 흡연장소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이 각박한 동네에서 내 흡연 장소는 갈 때마다 피식 웃게 되는, 경찰서다. 보호받으며 나쁜 짓-어디까지나 기호식품이지만 내 몸에겐 나쁜 짓일테니-하는 짜릿함이 일품이다. 소박하게, 은은하게 흡족한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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