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 안주와 코스로 술을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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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지난 1월에 애면글면하던 시나리오 5고에 마침표를 찍고 관계자 ㅅㅎ형과 ㄱㅂ작가에게 보냈었다. 설 선물이랍시고 보내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었는데, 회신을 기다리다 못해 덜컥 약속을 잡았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 겸 ㅅㅎ형 집들이. 형의 집은 너무나 이상적이었다. 각 공간 별로 꼭 있어야 할 가구가 하나, 혹은 둘이 있었고 없어도 되겠다 싶은 공간에는 가구가 없었다. 어서 내 집 장만하고 싶다는 마음에 부릉부릉 시동이 걸렸다. 내 집 마련 시기를 좀 앞당겨 볼까. 일단 집은 잠시 넣어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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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의 시작은 가리비찜과 와인이었다. ㅅㅎ형은 홍가비리를 일일이 손질했는데,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다시는 가리비찜을 먹고 싶지 않아 졌다고 했다. 형의 외로움 덕분에 한껏 예뻐진 따개비 붙은 홍가리비찜은 정말 맛있었다. 약간의 탄산이 가미된 '로사' 와인은 적당히 달콤하고 가벼웠고, 이어서 마신 두 번째로 등판한 와인 'mm(음)'은 알코올 함량이 약 10%가량 높아지면서 탄닌이 강해졌는데 이 흐름, 뿌듯했다. 술 고르고 음식 고르는데 촉이 제법인 나, 좀 멋진 듯.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대화합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의 포근한 조화였다. 두 번째 와인이 한 잔씩 남았을 무렵 잠시 쉬어갈 셈으로 프로슈토와 치즈 두 종류를 곁들였고, 첫 번째 접시도 마무리.

두 번째 접시는 무늬오징어 통찜과 독도 37이었다. 형은 무늬오징어를 내장과 함께 '통'으로 쪄냈는데 익임도 안성맞춤, 고소하고 부드러운데 쫄깃한 맛도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독도의 재발견, 너모나 맛있는 증류주를 내 마음에 저장했다지. 이름마저 마음에 쏙, 딱이다. 그리고 이즈음 속닥속닥이 시작되었다. ㅅㅎ형도, ㄱㅂ작가도 전혀 새로워졌다고 입을 모았다. 올해 안에 티저라도 한 토막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술이 맛있어서 한 번, 의견에 동의하기 위해 한 번, 안주가 맛있어서 한 번- 뼈를 깎아 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방금 비운 술잔에 또 술을 채우고 단숨에 털어 넣었다. 사이사이 큐시트처럼 만든 대본을 펼쳐놓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적느라 분주했지만 독도 37을 즐기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정성껏 썼더니 정성껏 읽어준 두 사람, 이런 고민 저런 고민하며 썼는데 가능성을 고민해 준 두 사람에게 마음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사랑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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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미니멀리즘이라고 외치던 어묵탕(어묵꼬치와 파머리 한 조각이 전부였다)을 건너 제육볶음이 등장하며 '빨간 뚜껑'이 등장했다. 소주의 등장으로 공장에 얽힌 소주 맛에 대한 이야기와 진로 골드의 등장, 제육볶음이 매워서 특별히 등장한 튀김만두 두 개, 채소라곤 깻잎뿐이었는데 물기를 털겠다고 깻잎을 쥐어짜버린 ㅅㅎ형, 틈틈이 딸아이와 상담하느라 바빴던 ㄱㅂ작가, 이 모든 순간이 마냥 즐거워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돌려대던 나까지 아주 그냥 딱 좋은 시간이었다. 술을 더 사 와야 하나 싶었는데 안주도 술도 딱 맞춤한 양이었던 코스 안주와 코스 주류는 집들이 선물로 접시 세트를 선물하겠다는 약속으로 마무리되었다. 아 징짜, 너모 둏쟈나!!


아무튼, 2011년부터 아이디어를 발효시켜 온 이 이야기도 어느덧 4년째 쓰고 있는데 올해에는 조그맣지만 손에 잡히는 가능성을 만들고 싶다. 그럴 수 있도록 연필 대신 뼈를 깎아야지,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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