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Cocktail Blues

034 - 배우다

Cocktail Blues

by 유정

매일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몇 달째 좌식 테이블에 쌓인 채로 대기 중이던 '전입자'들의 전입신고를 진행하고 맞춤한 호실을 배정했다. 그리고 전입자들이 대기 중이던 테이블 위에는 단출한 임시보호소를 마련했는데, 여기에는 주로 잡다한 문구류와 디자인 공부를 도와줄 강사가 자리를 잡았다. 배움에는 때가 있다고들 하던데, 내게는 이 '때'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제대로 된 -작으나마 사무실이 있고, 부서별로 담당자가 있고, 쥐꼬리만 해도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첫 회사에서 시작된 배움이다.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했던 쿽(Quark), IBM에서 쓰던 편집디자인 프로그램으로 맥과 어도비 인디자인에 밀려 추억 속 프로그램이 되었다. 쿽과 인디자인의 맞물려 있던 그 교차점에서 배움이 시작되었다. 유난히 뒤통수가 예뻤던 아이맥과 IBM 데스크톱 사이, ctrl과 cmd 키를 오가는 동안 '나, 뭐 좀 돼?' 하며 뿌듯해하던 기억은 뭔가를 배워야 할 때마다 자동 재생된다. 프리랜서가 되고 처음 프리미어를 배울 때, 사진을 배울 때, 방 안에서 조종기 시뮬레이션으로 드론 조종을 연습할 때, 프로젝션 맵핑을 배우고 있는 요즘도. 주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 '뭐가 그렇게 바쁘냐'를 지나 '할 줄 아는 거 많아 얼마나 다행이냐', '일복을 타고났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고 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으나 지난해부터 나는 스스로 '글 쓰는 사람'이라고 확실히 못 박아 두었고, 이제는 누가 물어보면 글 쓰는데 이런저런 것도 조금씩 할 줄 안다고 답한다. 그런데 프리랜서 이후로 지금까지 글 쓰는 사람으로 소개되는 일은 드물었다는 것이 함정.


유사(流砂)에 갇혀 있던 지난 5개월, 애써 찾은 정체성마저 내려놓았었다. 새로 만나고 있던 상담사가 '마른걸레를 쥐어짜고 있다'며 생사를 걱정할 만큼 지독했던 5개월이었다. 의사는 매번 칵테일 함량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었고 아싸리 독한 녀석을 부탁한다는 말을 억지로 삼키던 5개월이기도 했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이미 해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해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고독을 꿈꾸었으나 외로움만 가득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사그라들게 한 것은 결국 마음이었다. 그 마음이 내 것이었다면 더 좋았으련만 2n년째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회복력이 있을 리가 있나. 2n년 동안 는 것은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어깨너머로 배운 정보로 내 상태를 진단하고, 의사나 상담사가 말하기 전에 그들이 내게 해 줄 말을 알게 되고, 그 공식적인 진단을 분석할 줄 알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우울을 선명히 보고 티 나지 않게 다독일 수 있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쓰고 보니 굉장히 많은 것을 알게 된 것 같지만 정작 내 머리 깎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 문제다.


어쨌든 마음 덕분에 유사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무엇이었는지는 -과연 궁금해할 사람이 있겠나 싶지만, 일단 내가 궁금하기 때문에- 다음 글에서 곰곰 생각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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