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ktail Blues
오랜만에 백일장에 갔다. 청소년 시절 백일장에 나가 상 받았던 기억에 기대어 백일장에 갔다. 일확천금이나 다름없는 상금에 눈이 멀어 백일장에 갔다. 오랜만에 시간제한을 두고, 애면글면 해가며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옮기고, 두 손 모아 일확천금이 내게 오기를 바랐으나 일확천금은 오지 않았다. 일확천금을 바랐지만 얻을 수 없대도 좋다고 여길 만큼 즐거웠다. 그래서 일확천금이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모처럼 즐거웠던 그날을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 백일장에서 약 세 시간가량 고민하고 쓰고 적었던 글을 올려둔다. 옮겨 쓰며 한 번 다듬은 것 외에 오탈자만 바로잡은 것으로, 일확천금을 받을 수 없었던 부분을 짚어 주는 주신다면 또 한 번 기쁠 것이다.
집에 갈 때는 항상 망설임과 함께 걷는다. 집으로 가는 길은 온통 술집과 노래방, 유흥주점의 화려한 간판으로 어두울 틈이 없다. 앞만 보며 걸어도 어떡하든 시야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술과 안주를 짐작하게 만드는 간판들. 가뜩이나 퇴근길은 배고프기 마련인데 한 잔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일의 출근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참아야 할 술 한 잔. 한 잔이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망설임과 함께 걷게 될 수밖에. 집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마지막 골목까지 망설임과 헤어져 무사히 도착하면 삼삼오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맞이한다. 그들과 함께 나 역시 한 잔 하다 잠시 바람 쐬러 나왔다는 듯이 담배를 피운다. 담벼락마다 붙어 있는 각종 금연 문구 앞에서 각기 다른 종류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그리고 골목 모퉁이에 놓인, 한때 양념통이었을 지저분한 꽁초통은 볼 때마다 싱거운 웃음이 절로 난다. 어느새 필터까지 타버린 담배를 허리까지 굽혀가며 꽁초통에 비벼 끄는데 담벼락 아래에 습자지보다 얇은 꽃잎을 파르르 떨며 모여 있는 제비꽃 한 무리가 보인다. 그 사람, 잘 있을까. 집이 코 앞인데, 다시 간판 가득한 골목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그 사람이 생각나면 한 잔을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어진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그 사람을 처음 본 건 이 흡연 골목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면서 비틀거리고 있었으니 만취했을 게 뻔하고, 되도록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한 손에 소주병을 들고 있었는데 반쯤 남은 소주가 남자의 비틀거리는 걸음에 맞춰 찰랑이는 걸 보고 있자니 바지락 술찜이 생각났다. 바지락 술찜에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병만 마시면 집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잠들고 산뜻하게 일어나 가뿐하게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그 사람이 주머니에서 찌그러진 종이컵을 꺼내더니 소주를 따르더니 그 술을 골목에 조금씩 뿌리기 시작했다. 무덤 위에 고수레하듯 세 번 정도 술을 뿌리더니 털썩 주저앉아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등 뒤로 지나가며 보니 그 사람은 보라색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술김에 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확실히 그 사람은 꽃을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 곁에 쪼그리고 앉아 꽃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민들레 같이 길쭉한 잎 사이에서 올라온 가느다란 줄기 끝에 숨만 쉬어도 파르르 떨릴 것처럼 얇은 보랏빛 꽃잎 다섯 장이 펼쳐져 있었다. 무슨 꽃인지 찾아보려고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미는데 그 사람이 중얼거렸다.
- 네? 저한테 말씀하신 거예요?
- 제비꽃.
- 제비꽃이요? 이 꽃이요?
- 응. 제비꽃이야.
- 이걸 왜 그렇게 보고 계신 거예요?
남자는 대답 대신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말을 흥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람이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비틀거리며 향하는 곳은 술집과 노래방, 유흥주점 간판이 빼곡한 거리였고, 그 골목이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그 사람은 ‘나이키’를 외쳤다. 스티로폼 박스를 메고 돌아다니던 떡장수가 외치던 찹쌀떡과 메밀묵처럼 구성지긴 했지만 떡장수의 외침과는 확연이 다른 ‘나이키’였고, 술 취해 비틀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흥을 돋우기 위해 리듬을 타는 걸음걸이처럼 보이게 만드는 ‘나이키’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나이키’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드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고, 심지어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도 많았다. 그 뒷모습이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서 홀린 듯 그 사람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열 걸음 정도 떨어져서, 일행이 아닌 것처럼 그러나 그 사람이 인파에 섞이더라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떨어져서 따라갔다. 외상이 쌓여 있어도 술 한 잔 걸칠 수 있는 단골집에 가는 걸까. 그런 단골이라면 테이블도 많지 않을 텐데 그 사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 할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뭐라도 물어보면 대답은 해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뒤따르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 사람이 허름한 노래방 간판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따라가 보니 그 사람은 정말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에게 몇 마디 하더니 복도를 지나 사라져 버렸고, 카운터에 있던 남자의 관심은 자연스레 내게 쏟아졌다.
- 혼자? 아가씨는 필요 없으시고?
- 아니, 그게… 방금 지나간 분은 뭐 하는 분이신지…
- 노래방에서 궁금한 게 애창곡 번호가 아니라 사람이면 곤란한데
- 아니, 그… 저어기, 골목에서 담배 피우다가 봤는데, 주저앉아서 꽃을 한참 들여다 보고…
- 그건 그 형님 버릇.
- 근데 그 꽃에 무슨 사연이…
- 그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
- 모르죠.
- 나를 생각해 주오. 낭만적이지.
- 그걸 어떻게 아세요?
- 형님이 귀에 피딱지가 앉도록 얘기해 주는데 모르는 것도 미안하지. 손님도 없고 낭만이 솟는데 한 잔 하고 가. 내일 출근 안 할 거 아냐.
- 제가 내일 출근 안 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회사원, 내일은 토요일, 직장인은 주 5일. 안주는 주는 대로 먹고.
뜬금없이 시작된 노래방 주인과의 술자리에서 그 사람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노래방 주인이 건달 시절에 만난 형님이라고 했다. 당시 큰 형님이 나이트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형님은 넉살도 좋고 맷집도 좋고 주먹도 좋아서 큰 형님이 문지기도 시켰다가 손이 부족하면 웨이터도 시키곤 했단다. 웨이터들은 그때그때 잘 나가고 인기 많은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 이름을 제 이름처럼 쓰곤 했는데 형님의 이름은 ‘나이키’였다. 어린 시절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를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 여태도 그 운동화 한 켤레가 없다며 이름이라도 갖게 ‘나이키’로 정한 것이라고 했다. 손님을 끌어와야 할 때마다 ‘나이키’를 구성지게 외치고 다녔고, 그 소리에 반응하는 손님들에게는 자질구레한 동전 마술이나 가짜 꽃 마술 같은 것을 보여주며 나이트로 데려오곤 했다. 주변에서는 저 형님은 조직에 있을 게 아니라 서커스단 같은 데 가서 삐에로를 하면 좋았들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풀린 건지 궁금해했단다. 그러다 만나게 된 여자, 제비꽃 같은 여자를 마음에 담게 되었고, 그 여자가 웃는 모습을 보려고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여자가 좋아하는 제비꽃을 꺾어다 압화를 만들어 코팅까지 한 다음 열쇠고리를 달아 선물하는 게 가장 약소한 것이었다고. 제비꽃을 좋아하던 제비꽃 같던 여자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마음 잡지 못하고 조직을 떠나겠다는 형님에게 큰 형님이 이 노래방을 차려준 것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노래방 주인은 잠시 쌍욕을 섞어가며 배신하는 새끼들은 다 모가지를 잘라야 된다고 투덜거렸다– 보스가 반 병신이 되면서 조직은 무너지고, 형님을 찾아 이 노래방에 온 것이 어느덧 20년이 다 되어 간다고 했다.
- 그때 그 시절을 못 잊어 여태도 저러고 다녀.
- 왜요? 사랑하는 여자도 없고 조직도 없고 손님도 없고 돈도 없는 마당에 노래방을 살려야죠.
- 그 시절에 다 있으니까.
- 그냥 과거에 갇혀 사는 거네요.
- 아니지 행복을 기억하는 거지.
- 행복보다 불행이 더 많은 것 같은데…
- 이놈의 어린놈아, 행복의 반대말이 뭔지 아냐?
- 불행이잖아요.
- 아니야. 행복의 반대말은 불복(不服)이야.
그 뒤로 무슨 말을 더 나누었는지,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노래방 주인이 <제비꽃>을 부를 때 그 옆에서 내가 잔잔하게 탬버린 흔들던 기억은 왜 선명한지 모를 일이다. 며칠 후 이번에는 그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싶어 다시 찾은 노래방 입구에는 ‘임대’라는 두 글자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네 개의 글감 중에 '삐에로'를 골라 쓴 글이다. 지인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고 메모장을 뒤적거려 몇 개의 글을 씨실, 날실 삼아 쓴 글이다. 힌트를 준 지인은 '나이키'의 구성진 억양을 효과음으로 넣었어야 했다고 했다. 나 역시 그 부분이 가장 아쉽다. 만년필로 옮겨 적으면서는 궁색하게 짜 맞춘 구성이, 좀 더 섬세하지 못한 문장이 아쉬웠다. 원고지가 모자랐다고 하기에는 좀 더 담백하게 썼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