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Cocktail Blues

032 - 退, 물러나다

Cocktail Blues

by 유정

술이 술을 마시듯 생각이 생각을 마셔대는 통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제자리가 어디인지 찾고 싶어서 떠났다. 오랜만에 혼자 나선 길이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나는 매일 다른 길, 다른 골목을 걸었으나 꼬박꼬박 숙소로 돌아왔다. 매일 저녁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집이 나의 ‘제자리’ 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제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무래도 내가 고장 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장 났다. 꽤 오래전부터, 언제 고장 나기 시작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저 조금 특이해진 것 아닌가 했는데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 사람들이 그래야만 한다고 다그쳤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고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망가지는 바람에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또 한 번 집을 떠났고, 처음 만난 공간에서 어쩐 일인지 익숙함을 만끽하며 골목들을 헤집고 다녔다.

그곳은 낯설어야 했는데 낯설지 않아서 머무는 내내 묘했다. 고요 속을 소란한 공기가 거닐고 있었는데, 그 소란함은 양손 가득 수 백 수 천의 삶으로 만든 수만 개의 구슬이 든 주머니를 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도통 선명히 설명하기가 힘들어 아무 말이나 해 본 것이다. 어차피 '느낌'이니까 그래도 되겠지). 그곳에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가로지를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천변에는 그저 크고 작은 풀숲과 나무들이 전부였고, 천변을 따라 단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림자마저 건물 속에 숨겨두고 있었다. 단층 건물에는 여인숙과 여관과 모텔이 골고루 섞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냉난방완비'를 강조하고 있었다. 모양과 재료는 달라도 하나 같이 미닫이 문을 달아 둔 현관 안쪽에는 수납장 같은 의자가 문 밖을 바라보기 쉽게 놓여 있고 스티로폼 상자 뚜껑부터 담요까지 여러 종류의 방석이 놓여 있고, 지난밤 내도록 앉아 있었을 누군가의 온기가 노곤하게 늘어져 있었다. 수납장 역할도 못할 것이 뻔한 의자 너머로 나무 계단이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고 그 계단 끝에는 한 사람 드나들만한 크기의 문이 횡렬종대로 서 있었다. 저 문 안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따스한 온기일까, 축축한 슬픔일까, 지폐 몇 장 같은 건조함일까, 산소호흡기처럼 한 없이 무겁고도 가벼운 허무일까. 내 그림자 하나를, 겨울 오후의 햇살 아래서 한껏 나른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고양이가 있던 여인숙인지 모텔인지 여관에 앉혀 두고 왔다. 내 그림자는 '냉난방완비'인 그곳에서 쾌적할는지, 혹은 쾌유할는지.

가능한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꺾으려 애쓰며 걸었던 골목들이었다. 직진만 하다가는 길이 끊길 수밖에 없을 테고, 어차피 길은 끊기겠지만 요리조리 꺾고 돌다 보면 길 끝을 만나게 되는 시간을 미룰 수 있을 테고, 엉덩이에 뿔 난 소 같은 내 소망이 꺾일 수도 있을 테고. 그렇게 비틀비틀 골목을 걷다가 암자를 발견했다. 큰 절에 딸린 작은 절이라기보다는 그저 수행을 위해 마련된 작은 집이었지만 호기심이 일어 참새가 방앗간 찾듯 미닫이 문을 열었다. 그곳을 지키던 박수는 쌀 점으로 점사를 보는지 작은 소반 위에 쌀이 담긴 놋그릇, 방울, 점사를 적는 이면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일러주니 중년의 박수는 내게 귀문살이 있어 유난히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신을 받고 저에게 좋은 일만 하며 잘 사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불리는 삶, 중생을 구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굴곡이 많을 거라 했다. 별다른 걸 하지 않아도 내 삶에는 굴곡이 많았다는 말을 삼키며 짐짓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박수는 참 파란만장 고단한 삶을 살았다며 다독여 주었다. 천주교 수녀가 될 것을 권유받았던 것, 나에게 맞는 마땅한 인간은 없으니 예수를 만나야 한다는 권유 같은 강요, 그리고 본격적인 종교에의 귀의 권유까지 이로써 천주교, 기독교, 무속까지 종교 3 대장을 완성했다(아, 연초에 알 수 없는 종교인 아마도 '도'로 추정되는 사람의 권유도 있었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장기가 팔려도 그 또한 좋은 일 아닌가 싶어 따라가 조상신에게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한 교명을 알 수 없으니 4 대장은 비공식인 걸로). 불교가 빠진 것이 좀 아쉽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다음 여행은 절과 가까운 곳으로 가야겠다. 어쨌든 박수는 살을 풀고 제자가 되었으면 이미 잘 되어 풍족했을 거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받은 세 번의 권유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권유였는데, 지금까지의 생이 수행이나 다름없으므로 더 이상의 공부는 하고 싶지 않아 '그렇군요'로 정리하고 암자를 나섰다.


며칠 머물지 않았음에도 꽤나 우당탕탕했던 이곳에서의 시간이 익숙하고도 사랑스러웠다(이곳에서의 시간에 사랑 한 방울을 떨어뜨린 일은 사랑스러우니까 다음 기회에 깊이 생각하기로 하자). 지난해부터 서울을 떠나고 싶었는데 떠날 수 있다면 이곳으로 떠나고 싶어졌다. 여러모로 실현되기 어렵겠지만, 뭐 생각은 할 수 있는 거니까.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있음에도 자꾸 무언가 하려고 나방이 모닥불에 달려들듯 달려들었던 건 제자리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러나 달려드는 곳마다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들었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느라 진을 뺐더랬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나는 눈을 뜨면 걷는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걷고 또 걸으며 제자리를 찾아다닌다. 찾다 찾다 결국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렇게 물러난다.

그 어디에도 내가 묻힐 곳이 없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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