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ktail Blues
01. 대청소의 대미를 장식하는 화장실 청소. 열과 성을 다해 솔질을 하는데 욕실청소 도구가 망가졌다. 시무룩. 괜찮아, 스퀴저 기능은 쓸 수 있어. 장비 욕심 크나큰 사람으로서 당장 새로 사려는 나를 막아서는 내가 서글퍼서 시무룩.
02. 퇴사 통보 후 태어나 처음으로 1등을 해보나 했는데 내 앞으로 퇴사자 2명이 생겨서 시무룩. 괜찮아, 그래도 퇴사는 바뀌지 않아. 아끼던 동료가 이별 대화 끝에 "저도 과장님처럼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해서 천국 입장 티켓 받은 것처럼 기뻤는데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기대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 갈아 넣은 뼛가루가 생각나 시무룩.
03. 7년 차에 접어든 에어컨에서 물이 줄줄 새서 시무룩. 괜찮아, 그래도 열흘 뒤면 서비스 센터 기사님이 오잖아. 하지만 에어컨 아래에 있던 책장 두 개가 촉촉해지다 못해 품고 있던 것들까지 흠뻑 젖었고, 그것들이 하나같이 뼈를 고아 만든 포트폴리오였고, 책장이고 포트폴리오고 주홍글씨 마냥 쨍한 주홍색 곰팡이가 만개해서 시무룩.
04. 역시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어서 시무룩. 괜찮아, 나는 내가 어떡허든 고치고 있잖아. 사람 내 맘 같지 않다는 걸 아니까 시무룩. 괜찮아, 응원해 주면 돼. 응원의 ㅇ도 듣지 않는 일이 부지기수라 또 시무룩.
05. 응앙응앙 투정 부리고 싶은데 투정 부릴 곳이 없어 시무룩. 괜찮아, 어차피 인생 독고다이가 국룰. 하늘 아래 홀로 서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人이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으로 만든 상형문자라고 해서 시무룩.
06. 곰팡이 핀 책장을 폐기물 신고하고 내놓았는데 퇴근길에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함빡 젖은 걸 보고 시무룩. 괜찮아, 나도 우산이 없어서 함빡 젖었는 걸.
07. 과연 청약은 로또인가, 1n번째 청약에 또 떨어져서 시무룩. 괜찮아, 10년 넘게 갚아야 할 대출 안 받아도 되니까. 살고 있는 집 계약 끝나가는 연말에 보증금과 월세가 쌍으로 4%가량 인상된다는 사실이 떠올라 시무룩.
08. 펫시팅에 지각해서 시무룩. 버스 배차 시간과 갑작스러운 소나기와 기타 등등의 악재가 겹쳐서 시무룩. 늘 도착 시간보다 10분 정도 여유를 두는데 10분을 까먹은 걸로도 모자라 지각해서 시무룩. 지금까지 100번의 펫시팅이 넘도록 지각은커녕 늘 너무 일찍 도착해서 시간 때우느라 애먹었는데 첫 지각이라 생각하니 더 시무룩. 서둘서둘 도착해 약까지 먹여야 했는데 약 먹인다고 고양이 고생시켜서 또 시무룩. 괜찮아, 오랜만에 팔뚝에 고양이 발톱 자국이 났잖아. 그래도 너모나 예쁜 고양이가 괴로와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지켜보았을 보호자가 내 맘 같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시무룩.
09. 소나기가 쏟아져서 오랜만에 비 다운 비를 맞겠구나 내심 기대했는데 비 그쳐서 시무룩. 괜찮아, 우산 값 아꼈잖아. 그치만 오늘의 비는 우산을 써도 다 맞는 비였다고.
10. 러브버그 떠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좁쌀 만한 벌레들이 우글우글해서 시무룩. 괜찮아, 전기 모기채가 있잖아. 하지만 이 벌레들은 전자 모기채 사이로 다 빠져나가기 때문에 시무룩.
11. 시루로 키우는 콩나물에 자꾸 곰팡이가 생겨서 시무룩. 세 번째 시도에서 조구만 곰팡이 걷어내고 계속 길렀는데 잔뿌리가 나서 시무룩. 괜찮아,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어묵탕 끓일 때 넣어 먹었는데 콩 특유의 비린내가 나서 약간 시무룩. 괜찮아, 그래도 콩나물 생장에 관한 프로세스는 파악했어.
12. 퇴사까지 아직도 3주나 남아서 시무룩. 괜찮아, 시간 금방 가.
13. 얼굴에 뾰루지가 가득해서 시무룩. 괜찮...기는 개뿔, 이거이거 내 의지와 상관 없는 거 자체가 너모나 싫어서 시무룩.
14. 사계절 중에 유일하게 안 타는 계절이 여름이었는데, 뇌가 녹아버려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는 게 유일한 장점인 계절이 여름이었는데, 왜 때문에 뇌가 녹다 마는지, 왜 때문에 생각이 자꾸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지 알 수 없어 시무룩. 괜찮아, 지구도 응앙응앙 투정 부리고 싶겠지, 그럴 때가 됐지... 응...?
15. 시무룩할 일이 많아서 시무룩. 시무룩할 일이 많은 건 반갑지 않은 날이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 중.
6월 중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시무룩에 대한 기록 끝. 사실 기록하지 못한 게 더 많은데 기화해버린 기억도 있고, 끝이 안 날 것 같아 잘라버린 것도 있고, 아직도 시무룩은 계속되고 있다는 게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