地乾宇 · 지건우 · 1978 · Yellow

Fairy Pitta

by 유정
오디세이아 [Odysseia] ⓒ fantastic scar pink
오디세이아 [Odysseia] ⓒ fantastic scar pink

나는 배우다

연극배우 지건우 ⓒ fantastic scar pink

배우가 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누이가 그랬다. 한 번도 배우를 꿈꿔보지 않았던 내가 누이의 말 한마디에 배우가 되기로 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5년 동안 배우로 살았다. 누이는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는데, 지갑은 늘 가볍다. 배우가 되기로 했을 때 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남보다 늦게 뛰어든 길, 남보다 빨리 달려 따라잡아야 했다. 연기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5년이 지난 지금, 배우의 삶에도 돈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없을 때면 돈을 벌었다. 언제 공연이 잡힐지 모르니 쉽게 그만둘 수 있어야 하는데, 대개 그런 일들은 공사판이나 치킨 가게,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공사판에서는 벽돌을 나르고, 치킨 가게에선 닭을 나르고 고속도로 위에선 화물을 날랐다. 그렇게 번 돈은 대개 통장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 공연을 하는 동안 빚진 것들을 제하고 나면 일곱 자리던 숫자들은 다섯 자리, 혹은 네 자리 숫자로 바뀌고 하룻저녁 술값으로도 쓰지 못하는 몇 장의 지폐는 사라진 제국의 화폐만큼이나 무가치하다.


나는 가난한 배우다

무대 위에서 시작된 내 가난은 돈처럼 돌고 돈다. 가난이 지나간 자리엔 사람이 남는다. 연기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들, 배우라는 인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는다. 그러므로 가난한 배우의 빈 지갑을 채우는 것은 사람이다. 지건우라는 사람을 배우로 보아주고, 지건우라는 배우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배부르다. 그들은 내게 밥과 얼마간의 온기를 준다. 내가 무너지면, 내 안의 사람들도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멈출 수 없다. 멈추지 않는다. 사람으로 쌓아 만든 계단을 딛고 올라간다. 그 계단참마다 헨젤과 그레텔이 그랬던 것처럼 작은 빵부스러기를 떼어 떨어뜨려 놓는다. 누군가 발견하고 따라와도 좋고, 그저 가져가기만 해도 좋다. 내 가난은 그렇게 돌고 돈다. 가난은 부유한 사람에겐 잔혹한 것이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


ⓒ fantastic scar pink


나는 스타가 될 것이다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시작하고 보니 마땅히 설 자리가 없다. 배우가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는 무대와 달랐다. 영화판에서는, 나 같은 조연은, 그저 소품일 뿐이다. 돈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그러나 배우는 배우이며, 배우여야 한다. 한낱 소품으로 사용되는 존재여서는 안 된다. 현장에 가면 모두 지폐의 말을 따라 움직인다. 감독도 주연 배우도 제작자도 돈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나는 가난한 배우이고, 가난한 배우가 바꿀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맡은 배역에 어울릴 옷을 고민하거나, 인물이 가진 버릇을 연구하거나… 이런 고민들은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으므로 상품이 되기로 했다. 잘 팔리는 상품이 되면, 그때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저 소품이어도, 단지 배경이라도, 되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나는 이기적인 배우다

늘 이기적이었지만 바로 지금이 가장 이기적인 순간이다. 좀 더 이기적이고 싶다. 어차피 이기적일 거라면 철저하게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가 이기적일수록 다른 사람 역시 이기적으로 나를 대할 것이므로. 이기심으로 만들어지는 경계는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는 완충지대를 형성한다. 타인과 나 모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기심. 때론 이타심보다 이기심이 더 선하다.


ⓒ fantastic scar pink


나는 갈매기다

한 마리 갈매기가 될 생각이다. 조나단 리빙스턴이라는 이름의 갈매기. 아무도 꾸지 않던 꿈을 꾸었던 그 갈매기 말이다. 조나단은 날고, 날고, 또 날았다.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지난 5년 동안의 나처럼. 나는 여전히 배우를 고민한다. 배우의 삶과 출근하고 퇴근해서 월급을 받는 삶이 쉬지 않고 나를 흔든다. 조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배우다. 좋은 배우가 되기를 꿈꾸고 보다 나은 연기를 위해 노력한다. 조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계속 걸어가는 일만 남았다. 조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 살아가고 있을 뿐인데도 세상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꿈꾸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조나단이라는 이름의 갈매기가 둘이 되고 셋이 되면, 세상은 조금 더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조나단, 한 마리 갈매기가 될 생각이다.


나는 걷기 시작한 배우다

다른 사람들이 십 년 걸려 걸어온 길을 4년 만에 걸어야 했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갈 시간이 내게는 없었다. 2년, 5년, 7년… 듬성듬성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기 위해 더 높이 더 멀리 뛰어야만 했다.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기 위해, 그 인물이 내 안에서 숨 쉴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사람다워지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네 발로 짐승처럼 뛰었던 시간이었다. 이제야 겨우 따라잡았다. 이제야 겨우, 천천히 심호흡할 수 있는 틈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걷는다. 때로는 넓어지고 때로는 좁아지는 길을 걷는다. 내 호흡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걷는다. 걷고 있는 길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 fantastic scar pink


나는 살아가기 위해 산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남는 것, 내가 배우로 살 수 있는 힘이다. 배우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사랑받고 싶다. 관심받고 싶다는 욕망 또한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며, 본능은 관계를 만들어 낸다. 이 관계 때문에 보다 사람다워지는 방법을 찾아다녔다.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선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조금씩 사람다워졌고, 배우가 되었다. 나는 살기 위해 사람다워질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 연기로 관객을 설득할 것이다.

나는 배우로 살고 있다.


ⓒ fantastic scar pink

나는 배우다



연기에 설득당한 사람이다



연기에 미친 사람이다



나는 배우다




희망 광명 팽창 접근 가치 명랑 유쾌 대담 경박 주의 냉담 염증 … '노랑'을 설명해야 할 때 등장하는 단어다. 그러나 노랑은 따뜻하다. 스스로 확장한다. 명확한 밝음으로 쉽게 오해받지 않는다. 그러나 쉽게 빛을 잃기도 한다. 경계 위에 서 있으며, 고민한다.


경계 위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지건우



배우 지건우는 2023년 8월, 소천했습니다. 그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족쇄를 풀고 자유로워졌기를 바랍니다.




- 오디세이아 [Odysseia], 호메로스(Homeros) 作, 6048X4032 pixels

- 여기에 소개된 사진 작품은 현존하는 희곡 작품을 제목으로 차용하였기에,

작품 제목과 원작자의 이름을 함께 표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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