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a Writer
9년 전, 잘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는 생각에 쓰기 시작한 글이 있다. 2명뿐이었지만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북돋아주었고, 기왕 마셔대는 거 좀 생산적으로 마시자 싶었고, 그것들이 쌓이면 뭐라도 되겠지 싶어 시작한 글이다. 2년 동안 45편 썼다. 읽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비슷한 콘셉트(주제)로 글 쓰고 그림 그린 몇몇이 책을 출간했기에 호기롭던 마음은 이내 식어버렸다(어찌나 차지게들 쓰고 그리셨던지... 시무룩). 게다가 음식 사진 찍는 버릇 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유야무야 그만두고 잊고 있었다.
9년 후, 문득 생각났다. 그래 그때, 그런 걸 썼는데. 그러다 생각했다. 다시 시작해 볼까. 여전히 읽는 사람은 없겠지만 잘 정돈해두면 좋겠다 싶었다. 다시 보니 이게 무슨 의식의 흐름인가 싶어 정돈하는 일은 접어두고 새로 쓰자고 생각했다. 9년 전에 무슨 헛바람이 들어서인지 술자리에 동석했던 사람들을 이니셜로 지칭했는데 이 K가 그 K인지, 저 D가 누구인지, 이 B는 어디서 튀어나온 사람인지 기억이 흐릿하기만 하다는 사실도 한몫했다(사실 당시에 쓰면서도 사람들이 뒤섞이게 될 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끄집어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서 저 플랫폼이 폐쇄될 때까지 이대로 박제해 두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백수동 35번지 이야기’가 1년 정도 쓴 글인데, 이 글은 2년이나 썼으니 정말 잘하고 잘할 수 있는 주제이기는 했나 보다.
9년이 지났지만 당시에 쓰던 구성을 그대로 이어서 쓸 생각이다. 당시에 무슨 심산으로 이런 구성을 택해 이런 글을 썼는지 복기하는 차원에서 목록을 가져왔다. 가장 처음 쓴 글은 제목 그대로 궁중 떡볶이를 만들어 소주 마신 이야기다. 두 번째 글은 화이트 와인(Petit Bistro)에 라면을 먹은 이야기이고 세 번째... 그렇다. 제목이 곧 내용인 글들을 썼다. 당시 상황과 마음을 적어두기는 했지만 음식이나 술에 대한 평가도, 찐하고 짠하고 뭐 그런 단상도 아니어서 읽는 사람이 없었나 보다. 그래도 취향만큼은 있는 힘껏 드러낸 글이었는데.
2010.11.01 궁중 떡볶이와 소주를 마시다
2010.11.02 백포도주를 마시다
2010.11.05 간장 순살치킨과 소주를 마시다
2010.11.17 돼지고기 튀김과 소주를 마시다
2010.11.22 고기가 좋아
2010.11.24 오뎅탕과 고기빈대떡과 소주를 마시고 라즈베리 보드카를 마시다
2010.11.29 삼겹살과 소주를 마신 뒤 커피를 마시다
2010.12.01 모듬 소시지와 소주를 마시다
2010.12.06 돼지김치볶음과 깔끔한 조개탕과 소주를 마시다
2010.12.13 삼겹살과 소주와 소주와 보드카를 마시다
2010.12.14 새우튀김과 참이슬을 마시다
2010.12.21 족발과 김치전과 소주를 마시다
2010.12.23 보쌈족발과 감자탕과 묵은지갈비찜과 반반과… 소주를 마시다
2011.01.14 스미노프 소다수를 마시다
2011.02.24 묵은지 찌개와 소주를 마시다
2011.05.11 자가주유는 ‘self’입니다
2011.05.24 MAX를 마시다
2011.06.06 생고기와 소주를 마시다
2011.06.13 와인을 마시다
2011.06.16 HEINEKEN을 마시다
2011.06.19 소주 대신 두통을 마시다
2011.06.28 오비 골든라거와 코로나 엑스트라를 마시다
2011.06.30 눈물을 마시다
2011.07.04 수입 맥주를 마시다
2011.07.11 일본식 부대찌개와 소주를 마시다
2011.07.13 캔맥주를 마시다
2011.07.14 순대 곱창볶음과 양꼬치와 소주를 마시다
2011.07.26 모듬 치즈와 버니니를 마시다
2011.07.26 삿포로를 마시다
2011.07.28 돼지껍데기와 소주를 마시다
2011.07.28 독일 맥주를 마시다
2011.08.03 맥주를 마시다
2011.08.05 이름 모를 칵테일을 마시다
2011.08.05 술, 술, 술
2011.08.11 하루에 세 번 맥주를 마시다
2011.08.13 연어샐러드와 소주를 마시다: 노동酒에 관하여
2012.03.20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아사히를 마시다
2012.03.22 동동거리며 동동주를 마시다
2012.07.03 캔맥주에 빨대를 꽂아 마시다
2012.07.15 냉장고에 저장한 맥주를 야금야금 마시다
2012.09.19 우울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다
2012.09.19 삿포로 한 캔을 마시다
2012.10.15 이강주를 마시다
2012.11.14 아일랜드 맥주를 마시다
2012.11.14 이과두주를 마시다
2010년 11월 1일부터 2012년 11월 14일까지 모두 45편의 글을 썼다. 11월에 시작해 11월에 멈추었고 9년 후 11월에 새로이 시작하는 것을 보면 내가 11월을 좋아하는 것인지, 11월이 술을 좋아하는 것인지.
9년이 지난 지금도 평가는 젬병이다. 술은 아주 작은 핑계에도 술술 마시지만 내세울 만한 취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술 마시며 보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쓰게 될 텐데, 그저 바람결에라도 엄마가 보는 일만 없으면 좋겠다. 이 나이에 등짝 맞는 일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니까. 그래도 새 마음 새 뜻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니 이름도 새롭게 지었다. “Aa Writer”. 운전면허가 있지만 차를 살 생각은 1도 없는 이유, 운전이 필요한 모든 기계를 멀리하는 이유를 담뿍 담은 이름이다(사실 적극적으로 하려고만 들었으면 워낙 기계를 좋아하니 그게 무슨 기계든 운전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리 봐도 ‘운전’이라는 행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너무도 확실하므로 굳이 멋스러워 보이는 핑계를 붙여 본다).
꼬박꼬박 쓰면 좋겠는데 꼬박꼬박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거의 매일 마시고 있으니 글감은 넘쳐날 테지만 (아, 진짜 엄마가 보면 큰일인데) 매번 “쌀밥 먹은 이야기”만 쓸 수는 없는 일이니 고민이 필요하다. 일단 한 잔 하면서 생각해 봐야지. 어쨌든 무엇도 살 수 있는 백수동에서 ‘사람들’보다 더 먼저 더 오래 살고 있던 것을 빠뜨릴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