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ry Pitta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요. 이런 식의 이야기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네요. 속에 것을 꺼내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 번 해볼게요.
저는 배우입니다. 어려서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습니다. 실은… 연예인이 되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적어 내라고 하면 연예인이나 탤런트 따위를 적어내곤 했죠. 글쎄요…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당시엔 다들 어려웠잖아요. 저희 집도 그랬거든요. 먹고 싶은 과자를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없었던 것도… 부모님이 다투던 것도…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죠. 어린 나이에도 연예인이 되면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나 봐요. 하지만 끼가 많은 아이는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러다 처음으로 연극을 보게 됐어요. 지금도 제목이 기억나요.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었는데, 소꿉친구와 함께 보러 갔었거든요. 엄마들이 데려가 주셨죠. 어린 나이에도 인상적이었나 봐요. 그 연극을 보면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조명과… 무대와… 짙은 화장을 한 배우들… 그게 좋아 보였나 봐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른 직업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늘… 어떻게든…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부모들이 그렇듯이 저희 부모님도 반대가 심하셨어요. 배고픈 직업이니까요. 굳이 힘든 길을 가겠다는데 두 손 들고 환영할 부모는 없잖아요. 그래서 큰 맘먹고 가출도 했었는걸요. 연극부가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엄마가 반대를 했어요. 집을 나와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죠. 하지만 결국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다행히 연극부가 있는 학교이기도 했고…. 지금은… 많이 이해해 주세요. 아, 가족들이 제가 서는 무대를 보러 온 적이 있었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엄마한테 들은 얘기로는 아빠가 우셨대요. 제 앞에선 ‘또 언제 하는데’ 한마디만 하셔 놓고는…. 오빠는 그냥 ‘잘 봤다’고 한 마디 하더라고요. 경상도 남자들이 워낙 무뚝뚝하잖아요.
네? 네… 지금도 돈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 순간 놓아졌어요. 배우의 삶을 살면서부터였던 것 같아요. 많지는 않지만 복지회관이나 중·고등학교에 수업을 나가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어요. 지난해부터 처음으로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것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조를 나눠서 소품 한 편씩 공연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일이 좋아요.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점이 부족한지 정확하게 볼 수 있거든요. 지난해에 잘… 버텼으니 올해도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든… 살아지데요. 그래요. 가난은 불편하고… 불편합니다. 학교 다닐 때는 차비가 없을 때도 있었어요. 다행히 좋은 친구들을 둔 덕에 도움을 받기도 하고… 오빠가… 많이 챙겨줬어요. 생활비가 떨어지면 저한테서 가난한 냄새라도 나는지 용돈을 보내주곤 했어요. 오빠…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해요. 혼자서 다 짊어지고 있으니까… 가끔 술 마시고 전화를 하는데… 그때 속내를 털어놓곤 하거든요. 그 목소리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나요. 고마워서… 미안해서…. 하지만… 돈을 중심에 두고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게 제 삶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돈이 많으면… 좋을 거예요. 여전히 많이 벌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배우의 삶 속에서 그렇게 할 거예요.
그래요… 아직은… 무명배우죠. 졸업하고 지금까지 5~6 작품 정도 했으니 경력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요. 못해도 1년에 2~3 작품은 해야 하는데… 한 작품밖에 못하거나 아예 공연이 없었던 적도 있었거든요. 당연하죠. 사실, 졸업 작품은 배우가 되는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에 잘 이야기하지 않는데 저는 졸업 공연에서 맡았던 엄마 역할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여자 주인공의 엄마였는데…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을 찾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캐릭터였습니다. 대부분의 엄마들처럼…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도 겉으로는 언제나 행복해 보이는 캐릭터예요. 울타리를 벗어나고 싶어도 내 가족들이 상처받을까 봐 그 안에서만 사는…. 실은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재미있게 연기했고 가장 기억에 남아요. 언젠가는 <햄릿>의 거트루트를 하고 싶은데… 그러고 보니 또 엄마 역할이네요. 전 거트루트가 참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겉으로 보이는 외모 말고도 많은 것을 가져야 하는 인물 같거든요. 실은… 제일 해보고 싶은 역할은 햄릿이에요. 생각하지 말라더군요. 남자는 남자 역할, 여자는 여자 역할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기회가 되면 시도해보고 싶어요.
아뇨. 아직은 배울 게 많아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아, 그게 좋겠네요. 저는 지금 산을 오르고 있어요. 지금 서 있는 곳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산은 그저 봉우리가 보이지도 않게 높은 산의 능선이었던 거예요.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예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잊어버린 거죠. 아직 멀었구나, 부족하구나… 싶어요. 물론 정상만 바라보면서 오르는 건 아니지만요. 또 같이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야만 해요. 어떤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고 또 어떤 사람은 이 길이 아닌가 싶어 내려가다 말고 다시 오르기도 하는데… 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올라가는 사람이거든요. 또 모르죠. 어느 날 갑자기 성큼 뛰어오를지도.
산 정상에는… 뭐가 있을까요. 연기 잘하는 배우가 있겠죠. 맞아요. 좋은 배우, 연기 잘하는 배우… 연기를 하는데 어떤 공식이 있는 게 아니니까… 명확한 기준이라는 게 있을 수 없을 거예요. 조금 무섭게 여겨지는데… 그 기준은 제 안에 있다고 생각해요. 자만하는 사람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을 거고, 채찍질만 하다 보면 상처만 남거든요. 그렇지만 제 나이에는 안심보다 채찍질이 더 필요해요. 주위를 봐도 겸손한 배우들은 대부분 좋은 연기를 해요. 그런 사람들이 좋은 배우겠죠. 관객에게 공연은 잠깐이잖아요. 공연을 본 뒤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니까… 그런데 그 일상 속에서 문득 생각나기도 할 거예요. 한 번 보았던 연극의 한 장면을 다시 떠올리면서 자극을 받는 것… 그건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변하게 만들어요. 제가 연기하는 인물을 보고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면… 이런 것들이 조금씩 쌓이다 보면 좋은 배우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저는 서른 살의 배우입니다. 서른이 되면 한 번씩… 마음을 앓는다고들 하던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스물아홉 살과 다른 게 없더라고요. 대신 제 삶에 대한 책임감이 조금 생겼는데… 그래서일까요. 올해에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어요. 꿈꾸고… 상상하고… 그런 건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늘 꿈꾸고 있어요. 좋은 배우가 되기를… 힘이 남아 있는 한 무대에 설 수 있기를….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꿈을 버려야 해요. 땅에 두 발을 딛고 바로 서지 않으면 무엇도 이룰 수 없으니까요. 꿈만 꾸던 소녀가 이제 여자가 되어가고 있어요. 마흔… 마흔에는… 교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결혼해서 아이도 있겠죠. 무엇보다 계속 무대에 서 있을 거예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2.4~1926.12.29 | 독일의 시인으로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까지 여자아이로 길러졌다. 『기도시집』, 『형상시집』, 『말테의 수기』, 『신시집』,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등을 썼다. 정원의 장미를 손질하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짜 그렇게 ‘낭만적인’ 죽음을 맞았는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 로베르토 쥬코 [Robert Zucco], 베르나르 마리 콜테즈(Bernard Marie Koltes) 作, 6048X4032 pixels
* 여기에 소개된 사진 작품은 현존하는 희곡 작품을 제목으로 차용하였기에,
작품 제목과 원작자의 이름을 함께 표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