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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04. 2021

이름 없는 펭귄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Photo by Francisco Arnela on Unsplash

여자의 밤은 언제나 낮보다 길었다. 여자가 낮보다 밤을 더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마치 어린 왕자가 일출을 보기 위해 조금씩 의자를 움직이듯, 낮의 영역이 넓어질 때마다 조금씩 몸을 움직여 밤 그림자 속으로 물러났다. 여자는 아직 낮동안의 제 그림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볼 자신이 없었다. 빛 아래서 벌거벗고 설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는 밤이 좋았고, 밤을 떠날 수 없었고, 밤과 꼭 붙어 있고 싶었다. 여자의 바람대로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 헤아리는 것도 잊어버렸을 때 펭귄 한 마리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여자의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어디 가니?

바다에 가고 있어요.

왜?

바다에 가야 하니까요.


펭귄은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가야 한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여자는 펭귄에게도 이름이 있을까, 있다면 기억해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니?

없어요. 난 그냥 펭귄이에요. 내 걸음걸이도, 냄새도, 내가 내는 소리도 다른 펭귄과 다르지만 이름은 없어요. 난 훌륭한 코뿔소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러 바다에 가야 해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자를 뒤로하고 펭귄은 발걸음 한 번 흐트러지지 않으며 걸어갔다. 여자는 이름 없는 펭귄*의 뒷모습이 귀엽다기보다 안쓰럽고 그만큼 멋져서 펭귄의 뒷모습을 더 보기 위해 조금씩 몸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 펭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여자는 낮과 밤의 경계에 있었다. 여자는 발을 조금 내밀어 낮의 영역을 반쯤 디뎌봤다. 발가락이 따뜻했다. 여자는 참았던 숨을 터뜨리듯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고 난 여자는 이름 없는 펭귄이 남긴 발자국과 평행이 되도록, 낮과 밤의 경계를 걷기 시작했다. 왼 발이 따뜻해지면 뒤로 걸으며 오른발을 데우고, 오른 얼굴이 따끈해지면 바로 걸으며 왼 얼굴을 데우며 걸었다. 고개만 돌리면 "긴긴 밤"이 여자의 곁에 있었다. 여자는 그 긴긴 밤과 함께 계속해서 낮을 걷기로 했다. 걷고 또 걷다가 바다에 닿으면 이름 없는 펭귄을 만나, 아니 이름 없는 펭귄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펭귄의 발자국 모양을 꼼꼼히 그려 놓은 종이를 품고 계속 걷기로 했다. 걷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여자는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펭귄: 긴긴 밤, 루리, 문학동네, 1판 11쇄 2021년 8월 13일, 1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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