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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Dec 17. 2020

소파(小波)의 후예

百修洞 三十五番地 이야기 : 流浪船

Photo by Daniel Cheung on Unsplash

나는 어린이를 질투해.


여자의 고백에 친구는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냐면서도 이해한다는 듯 팔짱을 끼고는 시기와 질투의 차이에 대해 물었다. 여자는 답하지 못했고 친구는 그 차이에 대해 설명해 주었으나 그 설명을, 여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린이를 질투한다’는 자신의 고백이 너무 무거워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떼쓰는 어린이가 부러웠고,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가 부러웠고, 여자의 어린이 시절엔 없었던 귀엽고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잇감도 부러웠고,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도 괜찮은 어린이가 부러웠다. 여자는 자꾸 지금의 어린이와 자신의 유년을 비교하며 어린이들을 부러워했다. 그렇다고 어린이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이 시절로부터 벗어나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린이를 질투했던 것은 여자가 껍데기만 자라 버려서 그 속엔 여태 어린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어린이’는 조금 못돼서 제가 갖지 못했던 것을 가진 어린이를 보면 심술을 부리기 일쑤였다(그 심술은 모두 여자, 그 자신에게 부린 것이었지만 여자로서는 이 심술이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어린이는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나란히 걸어가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고부터 여자의 질투는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막상 어린이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던 차에 소파(小派)의 후예*를 만났다. 그이가 바라본 어린이는 여자가 어렴풋이 깨닫고 있던 것처럼 같이, 나란히 걸어가야 하는 존재였다. 다름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다른 만큼만 배려하면서 같이 걸어가는 사람이 바로 어린이인 것이다. 그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여자의 껍데기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서툰 걸음마에 뒤로 넘어질뻔한 아이의 등을 받쳐주면서 여자는 저도 모르게 조금 울었다.


이따만큼 뛸 거야.


제 등을 받쳐준 여자를 돌아보며, 여자의 껍데기 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가 말했다. 이제 1미터 조금 넘은 어린이가 정말 ‘이따만큼’ 뛸 수 있을까. 여자의 껍데기 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여자는 제 껍데기 속에 살고 있는 어린이에게 무릎보호대를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파(小波)의 후예: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사계절, 1판 1쇄 2020년 11월 16일, 15000원 / 인용글, 같은 책 2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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