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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지 않은 시간에는 꽤 많은 일들이 담겨 있는데, 텅 빈 방바닥에 쏟아놓고 하나하나 정리해야 마땅하겠지만, 당분간은 그대로 담아 두기로 한다. 언제건 정리할 수 있는 또 다른 시간이 만들어지겠지. 각설하고,
야근이 계속되고 있었다. 회사 동료들에게는 더 이상 필요 이상 마음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 함께 일하는 어린 동료들은 꽤나 총명하고 일머리가 좋아 자꾸 마음이 간다. 퇴근 시간이 늦어질 핑계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동료들을 지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일은 차고 넘쳐서 야근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처럼 야근이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에 퇴근을 했는데 배가 고팠다. 배고픔은, 감정과 감각을 모두 포함해 내가 유일하게 외면하지 않는 감각이다. 운동은 내일로 미루고 집에 가는 길에 있는 작은 선술집에 들어갔다. 마침 아무도 없었고, 주인은 친절하게도 추우니 안쪽으로 앉으라 했다. 테이블마다 손님 대신 옹기종기 앉아있는 온기들을 제치고 자리에 앉아 한우육사시미와 진로를 주문했다. 이 선술집의 단 하나의 단점은 참이슬 클래식이 없다는 것. 탄수화물은 소주로 대신하고, 단백질 보충에 충실한 메뉴 선택이었다.
메뉴를 기다리는 동안 물빛 소주병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남아 있는 일들을 가늠해 보고, 하고 싶은 일들을 헤아려보고, 오랜만에 혼자 선술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게 되었다는 설렘을 진정시켰다. 주머니에 빈 곳이 제법 눈에 띄는 연말이었다. 지금까지 고장 난 마음을 치료하는데 얼추 7~8백만 원 정도 썼을 것이었다. 다른 SNS에서 돈 천만 원은 우습다고, 방치하지 말고 뭐든 하라던 글들을 심상히 넘겼는데 내가 지금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치료비는 꽤 들 테고, 모아둔 도토리들을 더 이상 헐지 않으려면 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도토리는 또 모이겠지 싶다가도 지금까지 도토리 모으는데 얼마나 걸렸나를 가늠해 보면 '에라, 모르겠다' 싶어 져서, 부엌을 보니 한우육사시미는 좀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인데 먼저 나온 진로를 한 잔 마실지 말지 고민하기로 했다. 그냥 지금만 생각하기로, 어차피 내일 같은 오지 않은 것들은 짙은 안개 뒤에서 오고 있고 막상 안개 밖으로 나왔을 때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드디어 안주가 나왔다. 오랜만에 고즈넉한 시간, 오랜만에 숨 고르는 시간, 오랜만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에 맞춤한 안주였다. 빨간 뚜껑이 아쉬웠지만, 여차하면 한 병 더 마시면 되니까. 반 잔에 한 점씩 한우육사시미는 입 안에서 살살 녹고, 단단히 뭉쳐 있던 마음도 살살 풀어져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러는 사이 두 개의 테이블에 손님들이 채워지고 작은 선술집은 시끄러워지고, 다른 메뉴와 새 술을 더 주문할까 말까 고민하는 동안 한우육사시미와 소주는 딱 떨어지게 비워졌다. 아, 깔끔하다. 미련 없이 계산하고 선술집을 나설 수밖에.
밖으로 나오니 고장 난 것은 고장 난 대로 둘까 싶은데 고치지 않으면 술을 마실 수 없을 테니 계속 고쳐보자는 듯이 눈이 내렸다. 문득 다시 학생이 된 것 같았다. 과목별 선생님들에게 과목별 수업을 받는 동안 나는 이따금씩 혼자만의 모의고사를 치르며 고장 난 마음을 고칠 방법을 찾고. 다행인 건 등수도, 점수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한우육사시미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이 내려 준 깔끔하고 산뜻한 결론, 역시 겨울은 밤이 길어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