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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 요리사다. H는 내가 인스타그램에 선물 가운데 으뜸은 술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을 눈여겨보았다가 연말 선물로 술을 준비했다고 했다. 현관문 문고리에 걸어둔 작은 종이백에 H가 넣어 둔 것은 우렁이쌀로 만든 청주였다. 맛보고 싶었고, 안주 삼을 만한 것은 슈톨렌과 빈투바 초콜릿이 전부였다. 슈톨렌은 익숙했지만 빈투바 초콜릿은 낯선 것이었다. 그래도 달콤한 것과 달콤한 것 그리고 맑은술,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 체리도 있었네. 슈거파우더로 둘러싸인 슈톨렌은 견과류와 초콜릿과 제주 한라봉이 적절히 섞여 포슬포슬한 빵 가운데에서 제가 있고 싶은 곳에 맞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진해서 어두컴컴한 초콜릿에 둘러싸인 빈투바에도 각종 견과류들이 제가 있고 싶은 곳에 맞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붉다 못해 검은 체리와 우렁이쌀 청주도 조그마한 테이블 위에 제가 있고 싶은 곳에 맞춤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 또한 그 사이에서 있고 싶은 곳에 앉아 저들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청주 한 모금, 슈톨렌 한 조각, 청주 한 모금, 빈투바 한 조각을 먹어야 할지 청주 한 모금, 슈톨렌 두 조각, 청주 한 모금, 빈투바 한 조각을 먹어야 할지 경우의 수가 생각보다 꽤 많아 난감했기 때문이었다.
고단한 하루였다. 마음먹었고,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출근이었으나 모든 현장이 그러하듯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났고 15년 넘게 묵힌 마음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으나, 이제 막 숙성에 돌입한 어린 마음들에게는 마른 잔디에 떨어진 작은 불씨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려 제 마음을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는 것과 같았을 테고, 그럼에도 어린 마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의연하게 허튼소리를 조잘댔지만, 행여 그 어린 마음들에 내 마음까지 휩쓸리다 헛디딜까 싶어 겨울바람에 자꾸 마음을 널어 얼렸더랬다. 겨울이 겨울이라 좋아할 수밖에.
딱히 따끈하지 않은 선선한 방바닥에 앉아서 마시는 우렁이쌀 청주는 우렁 각시처럼 다정했고, 쌉싸름한 빈투바 초콜릿과 그보다 달콤한 슈톨렌은 제법 유쾌했고, 굳어서 캔디가 되어버린 슈톨렌의 슈거파우더는 물에 녹이면 얼마나 빨리 녹을지 궁금했더랬다. 그래서 슈거파우더 조각들 사이사이에 숨은 슈톨렌 조각들을 하나씩 골라 먹었지.
꽤 오랜만에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좋았던 날이었다. 체리에게는 미안하지만, 체리는 내 동료가 아니었고, 어린 마음들은 언제부터인가 내 동료가 되었고, 나는 동료들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 마음이 동료들에게도 전해졌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