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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an 10. 2024

오돌뼈 볶음에 참이슬 후레쉬를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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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라고는 하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세밑이었으니 액땜이라면 이보다 더 맞춤한 액땜이 없었으나 막내 고양이 춘분이 거울을 부수었다. 부수려고 부순 것은 아니었겠지만 거울은 산산이 부서졌고, 고작 유리 뒤쪽에 아말감을 바른 것이 뭐 대수냐 싶지만 -수은을 바르는 줄 알았는데 아말감이라니!- 유리 뒷면에 무얼 발라두었든 유리가 산산이 부서졌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으나 막내를 을러멘다고 거울이 다시 붙을 것도 아니고, 세 고양이들 모두 털 끝 한 올 다친 곳 없으니 되었고, 덕분에 나는 새 거울을 사게 되었으니 도랑치고 가재 잡아다 술상 차리고, 그럼 되었다 싶었다.


일요일마다 만나는 -내 몸을 각별히 아껴주고,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나 반기면서도 미안해하는- 마사지사는 뭉친 근육이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그 마음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왜 뭉친 근육이 풀어지지 않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지만, 값을 치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 뭉친 근육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마사지사의 그런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그런 마음을 받아본 적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받는 것이 못내 어색하고 불편한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밀쳐 두었던 기억들을 다시 꺼내볼 수밖에 없는데, 먼지 쌓일 틈도 없이 펼쳐보고 또 펼쳐 봤어도 오롯이 받은 마음은 찾을 수 없어 난감하고,  따스한 마음을 어떻게 받아야 좋은지 알 수 없어 난감하고, 알게 모르게 알아보지 못하고 밀어냈던 고운 마음들에게 미안해서 또 난감해졌다. 그래서 운동장에 가지 않았다.

운동장에 가지 않은 핑계치고는 꽤나 거창하고 또 멋쩍었으나, 핑계가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오며 가며 간판만 보던 닭집에 갔다. 닭집이라고는 부르기에는 어엿한 브랜드 치킨집이었지만 굴전과 생굴과 굴찌개와 묵은지 돼지찌개와 파전과 새우튀김과 오징어 볶음과 불고기 전골을 함께 파는 집이었다. 치킨 관련 메뉴보다 닭고기 아닌 메뉴 비율이 월등히 높은 이 가게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들어갔는데 손님이 있었고, 혼자 왔다고 하자 사장은 혼자니까 좁은 데 앉으라고 했다. 그 좁은 테이블이란 다른 테이블과 다름없이 4인용이었지만, 이미 테이블 위에 TV 리모컨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니 좁은 테이블이라 해도 괜찮겠다 싶었다. 테이블 위 TV에서는 처음 보는 트로트 관련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내어주신 기본 안주에 한 잔, 오돌뼈 볶음 익어가는 냄새에 한 잔 하고 나니 본격 주인공이 등장했다.



뻥이요는 좋아하지 않았고, 땅콩은 딱 알맞게 맛이 없었다. 안주 기다리는 동안 마구 집어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맛이 없었는데, 역시나 매콤한 오돌뼈에 놀란 입안을 진정시키는 데에는 보탬이 되었다. 고기와 오돌뼈의 비율이 거의 완벽하다 싶은 오돌뼈 볶음을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오독오독 스트레스도 씹고, 얼토당토않은 클라이언트의 요구도 씹어 먹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육통도 씹어 먹고, 다음날도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도 씹어 먹고, 변주된 옛날 노래들이 거추장스럽기는 했지만 -옛날 노래일수록 원곡을 사랑하는 편이므로- 고즈넉하고 편안한 가운데 입안은 매웠다.

'지금'만 사는 사람인데도, '지금'이 종종 버튼을 눌러 과거를 소환할 때가 많다. 이날의 술상이 고즈넉한 가운데 입안은 매운 것처럼, 지금이 소환하는 대부분의 과거는 어둑시니 같아서 조금만 바라보고 있어도 순식간에 지금을 삼켜버린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어서 어둑시니가 찾아와도 그러려니, 술 한 잔으로 고수레해서 보내지만 처음에는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귀신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만나게 되면 꼭 귀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결심했었다. 뭐, 소름 좀 돋고 시선을 피하고 싶더라도 이야기는 귀신 스스로 마침표 찍을 때까지 들어주고 해원(解冤) 시켜서 천국이든 극락이든 지옥이든 보내주자고 결심했었다. 언제나 한 번 만나보려나, 언제나 한 번 귀신을 달래줄 수 있으려나 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툭하면 어둑시니가 튀어나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지금이 더 좋고 지금만 사는 사람이지만 어둑시니를 해원 시켜 어디로든 보내려면 당분간은 어둑시니를 만날 수밖에.


수채화풍 '처음처럼'과 맵다면서도 기어이 싹 비운 오돌뼈 볶음과 마지막 잔, 매운 입안을 달래줄 도넛, 그리고 기사님이 배송 인증을 위해 뜯어 놓고 그냥 가버린 신상 거울


그렇게 한 차례 정리하고 나니 물 먹은 솜 같던 마음이 조금 보송해진 것 같았다. 비록 '혀딻은' 앙꼬 라즈베리 도넛은 생각했던 식감이 아니었고, 아무리 배송 인증을 철저히 한다지만 뜯어 놓고 그냥 떠나버린 택배기사님이 살짝 야속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맞춤한 거울이 왔다. 그런대로 다 괜찮은 밤이었다. 안 괜찮아도 괜찮은 밤이었고, 고즈넉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혼자 있어도 혼자 있어서 다행이다 싶은 그런 밤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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