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ktail Blues
그러니까 다시 쓰자 생각하고, 다시 쓰던 글을 나흘 정도 띄워두고 있다가 '아니오'를 클릭하는 바람에 쓴 적 없는 듯 잃어버린 뒤에 정신 차리고 보니 모니터에는 '윤슬'과 '자몽하다' 두 단어가 남아 있었다.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남아 있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다, 뭐, 그러려니.
병원과 상담실을 전전하다 마침내 '이곳이라면 나를 내던져 두어도 괜찮겠다'고 느껴지는 병원과 상담실을 찾았다. 병원의 의사는 내가 술을 마시는 것도 그러려니, 내가 자해를 하는 것도 그러려니, 내가 화를 내는 것도 애써 눈물을 삼키는 것도 굳이 정오가 아니면 찾아오지 않겠다 고집을 부리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의사는 아주 가끔씩, 단호했는데 그때는 내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놓지 말아야 할 것을 놓으려 했었다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의사는 3회기였던가, 4회기였던가... 짧고도 긴 상담 중에 색색의 알약들을 '칵테일'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참으로 좋았다. 나는 매 순간 감정들을 계량하고 섞어 그 상황에 맞춤한 감정들을 만들어 대접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담실은 카카오맵이 잘못된 주소를 알려주는 바람에 엉뚱한 곳에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가느라 20분 정도 늦었는데, 상담사는 오히려 서로 다른 지도 앱마다 서로 다른 주소가 등록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며 미안해했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본격적으로 상담을 해 보자고 결론을 내린 뒤 4회기의 상담료를 선결제하려는데 상담실의 대표 이름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과 같았다. 그 애가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만 같아서, 그 애 생각이 왈칵 쏟아졌는데도 나는 그 애에게 전화하지 못했다. 그 애의 아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내가 살아야 그 애의 손을 맞잡아 줄 수 있을 터였다. 가슴이 왈칵 쏟아지려는 것을 애써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왔더랬다.
그리고 첫 회기에서 뭐든 그려보라기에 그려보았다.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 아니더라도 한 번 써보자고, 녹색을 섞어 보았다. 상담사는 뭘 그린 거냐고 물었는데, 저 고사리들의 역사를 설명하자니 지나치게 장황할 듯해서 그저 어려서부터 곧잘 그리던 문양이라고 둘러대었다. 다시 보니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여전히 많고 많구나 싶은 그림인데, 찰랑찰랑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서늘하고 부드럽고 편안하다.
다행인 것은 꼬불거리기는 해도 엉켜 있지 않다는 것, 어디로 어떻게 뻗어가는지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른손이 그린 그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양손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 생각 없어도 괜찮구나 싶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던 미술치료 1회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