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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Jan 19. 2024

02-230505

Cocktail Blues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에라, 모르겠다, 써 제끼자' 싶기도 했다. 시간은 늘 그렇듯 제 속도에 맞춰 성큼성큼 걸어가고 상담사는 나에 대해 무엇이든 그려보자고 했던 것 같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빈 공간에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글을 채웠다. 

상담이 진행되는 내내 모차르트를 생각했다. 그 양반, 다른 학원 다니다 온 수강생에게는 수업료를 더 받았다지. 다른 선생의 기운을 모두 털어내고 다시 가르치려면 당연히 돈을 더 받아야 한다고 했다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어깨너머로 혹은 눈앞에서 이런저런 진단을 받고 상담을 받았던 것들을 모두 지우고 그 옛날 합평 시간마다 조금이라도 '의식의 흐름'이 보이면 질타받던 것도 잊고 손 가는 대로 그림 그리고 손 가는 대로 글 쓰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글을 잘못 쓰더라도 무심한 듯 쓱쓱 줄을 긋고 글을 썼다. 'delet', 'back space' 같은 것을 도도도도도도 누르지 않고 나도 모르게 눌러 놓고는 작용할라치면 가혹하다 싶은 'insert'도 쓰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이 꽤나 흥미진진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다가도, 어쨌든 소리니까 됐다 싶고 그런 생각마저도 거추장스러울 만큼 몰두해서 그림 그리고 글 썼다. 그렇게 자몽이 만들어졌다. 자몽(自懜)하다의 자몽이라서 자몽은 늘 졸릴 때처럼 정신이 흐릿한 상태라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것 같아도 로로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로로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었다(로로는 왜 로로인지 모르겠다. 이제와 굳이 끼워 맞춰 보자면 '어디로'의 '로'가 겹겹이 쌓인 게 아닐까, 길(路) 위에 이슬(露)인 걸까, 짐작할 뿐. 어느 쪽도 참으로 빈약해 보이지만).



어쨌든, 로로는 어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주 깊고 깊은 바닷속이었고, 깊어서 깜깜한 바닷속 동굴에서 살고 있던 자몽을 만난다. 자몽은 요즘 이야기를 듣지 못해 불빛이 사그라 들고 있다며 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로로는 딱히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자몽은 아무 이야기라도 들려주면 된다고 했고 무엇보다 '도와달라'고 했기 때문에 로로는 무슨 이야기라도 해주겠다고 대답한다.



늘, 아주아주 깊은 바닷속을 걷고 싶었다. 물론 압력이니 산소니 빛이니.. 그런 어떤 냉혹하지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는 잠시 접어두고, 내 머릿속의 아주아주 깊은 바닷속은 소리 없이 아늑하고 기분 좋을 만큼 서늘한 곳이었다. 반드시 그곳에 꼭 가고 싶다. 발자국마다 폴폴 날리는 모래 먼지가 아주 천천히 아주아주 깊은 바닷속을 떠다니다 가라앉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 머리 위에 있을 빛을 상상하면서, 어쩌면 왼쪽 귀에서 제 마음대로 스위치를 켜고 끄는 귀울림과 비슷한 소리를 몸 밖에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들을 수 없대도 귀울림 스위치를 수압으로 영영 부숴주면 더 좋고.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상담사는 정말 동화를 듣는 것 같은 표정으로 들어주었고, 설명이 끝나자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며 그림 사진을 찍었다. 나는 맺지도 못할 이야기를 섣불리 시작한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지만 나도 모르는 내 의식이 시작한 것이니 나도 모르는 내 의식이 어디로든 가서 어떻게는 마무리를 짓겠지 싶었다. 다만, 그게 자연사하기 전에 맺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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