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재수정)
[ 함께 들으면 좋을 곡 : Uma To Shika(요네즈 켄시), 바람꽃(아이유) ]
행복함을 담았다. 행복한 순간만 담았다. 그 외의 다른 모든 순간을 침묵시켰다. 세상 밖에 내보내야 하는 건 오직 행복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냐 물으면, 사실 그런 쪽에는 그렇게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힘들다고 소리치고 싶은 편에 가깝다. 힘들면 힘들다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게 내 마음에는 좋았다. 하지만 두려웠다. 나의 고난이, 고난 속에서 비롯된 슬픔들이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흘러가 그들을 아프게 하면 어떡할까라는 생각이 엄습해서. 만약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렇게 감정에 영향을 잘 받는다면, 행복한 순간만을 골라서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로 하여금 혹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내가 아픈 건 괜찮았으며, 그로 인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발 벗고 나서서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아픈 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래서 나의 우울이 주위에 버거움으로 닿을까 두려워 계속해서 혼자를 고집했다. 참 모순적 이게도, 주위 사람들을 바라볼 때면, 슬픔 속에 그 사람들이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고, 소중한 사람이 홀로 그 시간을 견디는 건 내게 있어서도 몹시 가슴 아픈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정작 내게는 혼자 침묵하라고, 강요하곤 했다.
내가 아픈 건 괜찮았다. 어디까지나 나의 아픔이면 괜찮았다. 이상하게 믿는 구석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죽으려 해도, 나는 결코 죽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기어이 살리고 살리셔서 맡기신 일을 다 하다 갈 것 같다는 생각을. (사실 그 핑계로 더 살아내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아픔은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고 또 이겨낼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그렇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내가 아무리 그 시간을 도와주고 싶어도 그 사람들 또한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뤄질 수 없는 부분이다. 소중한 사람들의 희로애락 그 모든 감정이 곧 내 것과 같이 여겨지곤 하였다. 물론 그 감정들이 어떤 이름을 지니고 있다 한들, 언제나 기꺼이 함께 나눠 들고 싶다. 또한 소중한 벗들의 기쁜 순간이나 슬픈 순간이나 언제나 함께 하고 싶다. 그 여정에 무엇이 있든지 간에, 함께면 다 괜찮기에 기꺼이 곁에 서고 싶다. 설령 그게 아픔일지언정, 같이 넘어지게 될지언정, 결코 그 시간 속에 소중한 벗이 혼자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존재 자체로 내 삶의 아름다운 별이 되는 이들에게 나 또한 힘이 되고 싶다. 내가 아파하는 상황에도 그 사랑들의 일상 가운데에 그 어떠한 슬픔도 깃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언제나 한결같다.
하지만 내 안의 소음에 자주 지치곤 하였던 나를, 나는, 자주 다그쳤다. 왜 돕지를 못하냐고, 왜 네 주위에 힘든 사람들이 보이는데 너는 손을 뻗지 않느냐고. 또 다른 나는 왜 나는 나를 돕지 않느냐고 말했다. 치열하다 못해 처절한 싸움이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싸움이라 생각했다. 이타와 이기. 후에 수차례의 폭풍이 지나쳐 간 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곳에는 이기심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힘들다고, 지쳤다고 말하는 곳에는 나만 있었다. 처음에 이타심이라 착각했던, 남이 힘들어하는 것을 돕지 못해 다그치는 나. 그조차 나뿐이었다. 사실 그 사람들을 보면 내가 너무 아파서, 도울 수 없는 나의 무능력이 너무도 절실히 깨달아져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디까지나 나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순전한 이타심에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며 건넸던 것들에 아파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제야 비로소 깨닫고 다시금 배우며 그렇게 뉘우치며 미안하고 죄송하게 되는 것들이었다.
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때, 혹은 깨닫고도 잊어버리고 착각하며 살게 되었을 때. 애석해했다. 어찌 이 마음들이 잘 닿지 않는 것인지. 그전에 내게 물어야 했다. 나는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느냐고. 진정으로 타인을 생각하고 있느냐고. 내 안에는 나만이 가득하지 않으냐고. 타인을 너라는 객체로 존중하는 동시에, 직접 내가 타인이 되어 그 마음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왜 내 안에서 한 발자국도 걸음 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느냐고. 나의 마음은 순전히 위하는 것이었다 한들, 판단을 공감과 헷갈리면 안 되는 것이 아니냐고.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걸음 했다 한들, 비롯된 것이 그렇게 전해져 닿는 것들이 아픔이라면 대체 누굴 위한 것이냐고. 그 마음들의 시초가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면, 내가 디딘 곳이 너들의 세상이 아닌 결국 내 안의 세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조금 덜 실수할 수 있을까. 하며. 나의 착각에서 비롯된 그 모든 말들에 베인 아픔들에게 미안했고 미안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마다 생각했다. 그냥 그들 앞에서 사라지는 게 맞지 않을까 하고. 오래전에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가 너무도 싫어서, 이해하지 못한 채 건네는 그 모든 것들에 사랑이 담기지 못한 채 껍데기뿐만이 건네지는 것만 같아서. 그 모든 감정을 지우는 걸 택하기도 했었다. 뒤늦게 그 사람의 입장에 나가 서 본 뒤에야 깨달았다. 누군가의 인생에 평생 있을 것 같이 약속했다가 사라지는 건, 어쩌면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최악이 아닐까 하고. 내 마음의 전부였던 사람이, 나의 매일이었던 사람이 갑작스레 사라진 세상에 산다는 건. 그 모든 순간이 죽지 못해 사는 것이었다. 처음은 원망이었고 그 후에 남은 모든 것은 후회였다. 더 사랑하지 못함에, 나의 마음을 아낀 것에 대한 처절한 후회였다. 더불어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 또한 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더하면 더했지. 나의 매일에 있다가 사라져, 깨어난 그 모든 아침의 시작이 공허하게 메아리치는 마음을 부여잡고 우는 아침을. 내가 멀어지길 택했던 사람도 그 시기를 겪었을 거라 생각하면, 내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이 결국 나였음을. 사라지는 게 맞다고 생각한 그 순간들은 어쩌면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결국 이 또한 내가 나를 잘 알지 못해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알려하지 않아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이런 순간들이 쌓여 감에 따라 뒤늦게서야 돌아보게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무지가 모든 것을 안다는 무식으로 직결되기에 너무도 쉽다는 것을. 자주 돌아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부지런히 그 시간들을 덮어나기에 급급했다는 것을. 이를 깨닫게 된 지금이라도 고쳐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다가온 소중한 인연들에 조금이라도 더 올바른 사랑을 건네고 싶다. 사랑이란 명목 하에 건넨 것들이 지나친 부주의로 하여금 아픔으로 전해지는 건 그만하고 싶다고. 또다시 실수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걱정에 가끔 숨이 막히도록 나 자신을 내몬다 하여도, 흔들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노력하고 싶다고. 도망치는 건 그만하고 싶다고. 도망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최선이라는 나만의 가정 하에 이뤄진 객관적 최악이라는 것을, 그 시간을 직접 겪음으로써 깨달았기에. 그래서 아무것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으로부터 뒷걸음치는 것보다, 그럴수록 그다음 걸음을 잘 해내기 위해 깊이 통곡하고 비워낸 것들로 좋은 것들을 찾아 담아내어 아프지 않은 사랑을 건네고 싶다고. 이 결심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할지언정 그 모든 말을 뒤로하고 사랑으로 걸음 하고 싶다고. 부족한 마음으로, 그러나 간절히 소망한다.
많은 나날을 착각하며 살았다.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아가신 바울 사도를 보면서. 그는 일생의 여러 날이 결코 쉽지 않았고, 또 괴롭기도 하였으나 주위에 힘을 전하는 이었다. 나는 그가 전한 그것들이 오직 그의 기쁨에서 비롯된 행복인 줄 알았다. 그가 삶의 기쁨만을 담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롤모델 삼으며 생각했다. 행복만을 전하겠다고, 오직 기쁨에서만 비롯된. 나의 모든 슬픔은 내 안에 잠재워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여, 찰나의 기쁨만을 집어내야겠다고. 그게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도움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뒤늦게 그에 대한 내 생각이 아닌, 그의 입에서 직접 비롯된 말을 보게 되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담긴 고백이다.
그의 약함을 약함으로 인정하였고 또한 이를 드러내기를 겁내지 않았다. 그래. 행복을 전한다 하여, 늘 기쁠 수는 없다. 그곳에는 슬픔 또한 존재한다. 그는 골라내지 않았다. 기쁨만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기쁘나 괴로우나,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그럼에도 감사했다. 나만의 시선에서 얽힌 명백한 오해에 또다시 탄식하게 되는 대목이다. 내쉬는 것이 힘 되는 것들이길 바랐는데, 나의 무지로 하여금 소중한 이들에게 나조차 들이쉬기 버거운 것들을 쉬어내고만 있었구나.
먼저 나를 알아야 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써야 했다. 나를 쓰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행복만을 담으려 해서는 안 되었다. 행복한 척에는 관심이 없지만 행복함만을 담으려 하다 보니, 슬퍼지는 순간을 뒤로 감추게 되더라.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슬픔이 아픔이 되지 않게 하고 싶다 하여 감춘다 한들. 그 감춤으로 하여금 나에 대한 무지가 과열화되고, 그게 결국 사랑이 아닌 것들로 빚어지게 된다면. 결국 그렇게 아픔으로 닿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그 시작이 좋은 마음이었다 한들, 이뤄진 것들이 슬픔이라면, 결국에 마치게 되는 마침표라면 그 비극에 누가 남아 있고 싶어 하겠는가. 조명해야 할 때였다. 나의 모든 순간에 대해 주목해야 할 때였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할 때이다.
뉘우칠 것들이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다. 전해야 할 미안함이 하나 가득이다. 나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미안함에 고마움을 전할 시간들이 빼앗기는 건 두고만 볼 수 없는 일이다. 고마움을 전하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에 미안함이 더욱더 늘어가는 건 그만두고 싶다. 고마운 일에 고맙다 전하고 미안한 일에 미안하다 앞장서서 전하돼, 사는 동안 고마움을 보다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렇기 위해서는 미안할 순간들을 줄여 나가야겠지. 먼저 나를 돌아보자. 이 안에 담긴 것들을 둘러보고 살피고 비워내자. 비워낸 그 자리에 다시금 담아내자, 나눌 사랑을.
늦었지만, 먼 길을 돌아 이르렀지만 괜찮다. 이제서라도 바라보아 다행이다. 걸음 하자.
가자, 꽃조차 피지 않는 내 안쪽으로.
그렇게 이 여정을 거쳐, 사랑을 전하러 나아가자.
있는 그대로의 모든 당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