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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n 02. 2023

정지우 작가님, 죄송합니다.

작가님의 글쓰기 노하우를 만천하에 공개하겠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10년 동안의 노동을 끝으로 은퇴를 목표하고 있다. 사실 은퇴는 그저 수단일 뿐이고, 내 삶을 미래에 의탁하지 않고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 목적이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내 삶을 돌아보면 대학교를 가기 위함이었고, 휴학기간까지 합쳐 7년 동안의 대학생이었던 내 삶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함이었고, 직장인으로서의 내 삶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안락한 가정에 대한 이상향을 쫓아가기 위함이었다. 나는 현재를 살지 못했고, 미래에 내 행복을 의탁하며 살아왔다. 또 살아내고 있다.


그런 내게 최근의 10주는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10주라는 시간은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10년 뒤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꾸기에는 짧은 시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주는 내게 충만한 확신을 가져다줄 만큼, 그 믿음의 밀도가 단단하다. 그 10주의 정체는 정지우 작가와의 글 쓰기 모임이었다. 그는 매일 쓰는 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간다. 정지우 작가가 현재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매 순간을 쓰면서 삶을 정성스레 살아가는 것을 보고, 나도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무작정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Glenn Carastens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내 삶을 현재에 온전히 살아가려면 내가 가지는 감정과 생각에 대해 보다 진솔하게 쓸 수 있어야 했다. 따라서 나는 사회 변화를 열망하며 행동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편견과 그 누구도 내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내 행동을 통제하며 생기는 고통의 순간과, 스스로를 향해서 행했던 채찍질 끝에 조금이나마 사회 변화를 이끌어간다는 이상향과 성취감 같은 것들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 변화를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와 동시에 내가 바라는 사회를 사람들에게 글로 전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게끔 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다.


정지우 작가는 모임 도중에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란 독자들과 나누는 일종의 대화다. 대화를 하면서 말하는 사람만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야기가 성립하지 않는다".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10년 뒤 은퇴하고 나서 글 쓰기를 지속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글 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정리되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힘이 생긴다. 하지만 내가 사회 변화에 대해서 글 쓰기를 목적으로 하고 있는 이상,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없다면 이 대화를 지속할 수 없을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즉 내가 쓰는 사람으로 지속가능하려면, 누군가는 내 글을 읽으며 자그마한 변화를 함께 꿈꿀 사람이 필요했다.


글 쓰기 모임 이전에 내 글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일상의 부분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면서 공감해 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가 내가 평소 읽는 책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주로 곁에 두고 읽는 책들은 '정의란 무엇인가', '사피엔스', '위어드' 등 하나같이 두껍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읽기 싫어하는 책들이 그 전부였다. 인문학과 철학 관련된 책들만을 여러 권 읽고 나서, 바람직한 사회는 응당 이래야 한다는 사회복지사 필터를 통해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독자들은 생각지 않았고, 일방적인 내 이야기들만이 가득했다.

ⓒ  Olia Gozha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하지만 정지우 작가와의 글 쓰기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 글이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방식 때문이었다. 정지우 작가의 인문학 관련 글은 내 글에 비해 읽기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 그는 사회에 대한 통찰을 담대하게 제시하면서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생각에 거부감이 없도록 쓴다. 그와 나의 글에서 가장 큰 차이점 중에 하나는 상세한 설명이었다. 나는 경험을 작성할 때도,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가정하며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읽는 사람들은, 마치 1부터 10까지의 과정 중에서 1, 5, 7, 9, 10 정도의 정보만을 가지고 비어 있는 숫자들을 유추해야만 했다. 나는 글을 읽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정보를 누락한 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골라 써놓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번째로 글 쓰기 모임을 하면서 느꼈던 그와 나의 글에 차이점은 '디테일'이었다. 전후 상황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면, 가정하지 않고 빠짐없이 글을 써서 읽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도록 쓰는 연습을 했다. 이야기가 서술될 필요가 있는 부분은 상황에 대해 묘사를 세부적으로 했고, 논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주장에 대해 근거들의 원인과 결과를 맞춰야 했다. 친구라도 등장하면, 그에 대해 정보를 전달해서 읽는 사람이 쉽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도록 글을 썼다. 콘텐츠를 빠르게 소비하는 현대 사회에서 글 자체가 완독률 자체가 높지 않기에 독자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최대한 친절해질 필요가 있었다.


세 번째로 글 쓰기 모임을 하며 가장 뼈저리게 느꼈었던 그와 나의 글에 차이점은 '직관성'이었다. 그의 글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서, 글을 읽음과 동시에 그의 생각을 마치 내 뇌로 직접 배달해 주는 느낌이다. 그러나 글 쓰기 모임 이전의 내 글을 다시 읽어보면, 내 속에서도 미처 정리되지 않았던 개념이 마구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장애에 대한 예측불가능성은 공포를 유발하는데, 이는 내가 장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논리로 글을 썼던 적이 있다. 이 글을 자세히 뜯어보면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예측이 가능해지면 공포가 사라져야 했다. 그러나 주장에서 나와있듯이 '예측불가능'과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익숙함'이라는 전혀 새로운 개념을 섞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헷갈리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정지우 작가와 글 쓰기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몇 번이고 다시 내 글을 읽으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파악해야만 했다.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서로의 글을 읽고, 글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기 때문에 내 글을 끝까지 읽어야 했다. 하지만 읽는 사람들이 블로그와 같은 곳에 있는 불특정 다수라면 상황이 다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직관적이게, 나아가 개념들을 혼재하지 않고서 하나의 이야기로 마치는 연습이 필요했다.

ⓒ  Markus Spiske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정지우 작가는 내가 사회 변화를 위한 글 쓰기가 목적이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내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이도록 하는 글 쓰기 방법을 알려줬다. 그 방법은 내 삶의 부분을 글에 녹여내는 것이었다. 내 글이 읽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사회는 응당 이래야 한다.'는 식의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주장만 있었다. 따라서 읽는 사람들이 공감하기보다 내 글을 속 빈 껍데기라고 느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왜 사회 변화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계기에 대한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쓰면 읽는 사람들이 크게 공감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글에서 내 삶을 진실되게 드러내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변화가 필요하다 느꼈던 순간을 쓰기 시작하니까,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변화에 대해서 공감하기 시작했다. '사회는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라고 쓰지 않아도, 내가 사회 속의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순간들은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동일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 경험에 대한 내 해석이 내 글을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하게 했다. 삶에 솔직하고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 쓰면 쓸수록, 오히려 사회변화에 공감하도록 하는 글이 되었다. 나는 이제야 사회 변화에 대해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와서 글 쓰기 모임 이전에 나를 돌아보면, 나는 단순히 말 많고 젠체하는 꼬마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방학숙제로 일기를 썼던 것 이외에는 내 이야기를 글로 써본 적도 없었다. 대학교에서는 리포트를 써서 좋은 점수를 받거나 사회복지 발전을 위한 공모전에 제출하여 상을 받았던 경우는 있었지만, 사람들이 공감하는 글 쓰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글쓰기 모임 이전에 썼던 글들은 내 감정과 세부적인 상황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단순한 지식의 나열이나 논리가 맞지 않는 생각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인문학이나 철학, 사회복지를 근간으로 하는 생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는 읽는 사람들에게 불친절했으니 더 읽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연히 글 쓰기 모임 이전에는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내가 업로드하는 글 쓰기 공간인 네이버 블로그나 브런치에 발행한 글은 보통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읽었다. 그 20명 안에는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를 응원하는 친구들도 포함된 숫자다. 조회수도 물론 작았지만 내 글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조회수보다 중요한 것은 내 글을 읽고 진심으로 공감하며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간혹 내 글에 대한 공감과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남겨주는 댓글들은 내가 계속해서 사회변화에 대한 글 쓰기를 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예상보다 적은 공감들은 가혹하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글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느껴지는 추상적인 느낌뿐만 아니라, 네이버 블로그나 브런치에서 공감이나 댓글, 구독 등 수치로 드러나고 있다. 전자책 출판이나, 국내 스타트 업 '헤드라잇'에서 창작자로서 활동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다. 다른 글 쓰기 모임에는 참여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정지우 작가와의 글 쓰기 모임의 10주는 내게 특별한 기회이자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 덕분에 사회 변화를 쓰는 사람으로서 현재와 은퇴하고 나서의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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