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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May 15. 2023

스승의 날만 되면, 교수님께 A/S를 받습니다.

나는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학교가 아니라 서점에 간다. 교수님에게 드릴 책을 구매하기 위해서다. 졸업하고 처음으로 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내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했다. 나에게 그 책을 선물하는 이유를 설명함과 동시에, 앞으로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을 응원한다는 글귀도 책 표지에다가 적어줬다. 특별한 포장은 없었지만, 내게는 어떠한 선물보다도 귀했다. 나에게는 책을 선물하는 모든 과정이 생소해서 마치 어른이 된 것만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선물 받았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맨 앞장.

하지만 나는 상상 속에서만 어른이었다. 나는 졸업하자마자 사회복지사로 취업을 했고, 그로 인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교수님과 함께 나누러 갔었다. 교수님 입장에서 보자면, 마치 아이가 스스로의 성취를 부모에게 자랑한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갓 졸업한 제자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했겠지만, 그녀는 전혀 내색하지 않고서 내 홀로서기를 지켜봤다. 심지어 한 달 동안 유럽 여행을 가느라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제자가 밉지도 않았는지, 그녀는 내 사회복지사로서의 삶을 응원하며 환대하고 독려했다.


그 교수님은 항상 학생들에게 가까웠고, 눈높이를 학생들에게 맞췄다. 교수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친구의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내가 학생으로 학교를 다니며 학생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교수님이었다. 대학생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수차례의 자문도 귀찮아하거나 꺼려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지금에 그때를 돌아보면, 굳이 학생들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교수 직위를 유지함에 있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늘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 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녀의 수업은 다른 교수님의 수업과 달랐다. 대부분의 전공 수업들은 '사회복지' 기술과 지식의 전달이었다. 이를 테면 노인이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이는지, 성장기의 청소년과는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지, 가정 불화가 있다면 가족 치료의 기법은 어떤 종류가 있는지 등의 지식들이었다. 분명 효율적인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사회복지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는 '왜' 그런 기술을 알아야 하는지, '어떠한' 가치관을 사회복지사가 가져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학생들이 직접 고민하도록 했다. 기술이나 지식을 전달함에 있어서 질문을 활용하여 '왜'에 대한 답을 찾게 했고, 수업 시간에 특정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며 사회복지사로서의 가치관을 세우도록 했다. 물론 모든 과정이 토론과 질문의 연속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스스로 고민하고 질문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다름이 졸업을 하고서 7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직 그녀에게만 'A/S(애프터서비스)'를 받으러 가는 이유다.

이번에 선물 받은 '미사 너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

'사회복지 A/S'로 교수님을 만나는 과정에서 일종의 문화가 생겼다. 처음 책을 선물 받았던 이후로, 교수님을 찾아갈 때면 나도 책을 선물한다. 서로 말로써 약속한 적은 없었지만, 만남을 약속함과 동시에 곧바로 선물할 책을 준비한다. 나는 교수님에게 보통 에세이나, 소설 같이 쉬이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른다. 전공 관련이거나 사회나 인문학 관련 책들은 이미 교수님이 읽었거나, 아는 내용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교수님에게 주로 철학과 관련한 책을 선물 받았다. 대학생 때 흠모하기만 했던 철학에, 직장인이 된 지금 더욱 깊이 빠지게 된 것 또한 교수님 덕분이다. 철학은 질문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내 삶에 대해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한다. 졸업하고 나서도 내가 사회복지사로서의 중심을 잃지 않도록 교수님은 계속해서 'A/S'를, 즉 가르침을 주고 있는 셈이다. 교수님에 대한 신뢰가 선물해 준 책과 연결되며, 그 책이 담고 있는 가치를 내 속에 차곡차곡 쌓는다.


나는 아직도 교수님을 찾아가면,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교수님으로부터 배운 가치를 바탕으로 어떻게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는지에 대한 일종의 자랑이다. 아마 찾아가는 학생이 나뿐만은 아닐 텐데도, 교수님은 지루해하거나 일방적으로 내게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지 않는다. 교수님은 무용담과 같은 내 자랑에 오히려 공감하고, 독려하고, 지금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현장의 이야기들을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 나 보이기까지 한다. 나는 교수님 앞에서 아직 하염없이 어린 학생이고, 교수님은 지혜와 인내심을 가진 선생님의 관계다.


교수님의 학생들을 위한 마음은 내가 교수님을 처음 봤던 10년 전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교수님과 내 관계에 변화가 있다면, 이제는 나도 교수님에게 작게나마 영향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사회 변화를 위한 글 쓰기를 하고 있음을 교수님에게 말씀드렸다. 교수님이 의례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지만, 내가 하는 일이 귀한 일임을 연신 강조하셨다. 곧바로 내 글을 읽겠다며 브런치 구독을 하신 것으로 봐서 학생의 칭얼거림과 자랑에 대한 치켜세움 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상상 속에서만 어른이었는데, 이제는 현실에서도 어른이 되어감을 느낀다.

ⓒ  Greg Rakozy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존경하는 대상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내 성장을 측정하는 도구가 되고, 내가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하는 동력이 되고, 내 삶의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는 북극성이 된다. 그 처음은 비록 일방적으로 배움을 얻는 관계였지만,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며 한층 성숙해 간다. 교수님이 바빠서 책을 준비하지 못하실 때도 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내가 선물하는 책으로, 내가 하는 일로, 내가 쓰는 사회 변화 글쓰기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흔히 아는 'A/S'와 달리, 교수님과의 'A/S'는 더 이상 일방적이지 만은 않도록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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