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용 May 12. 2023

위스키와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을 동경하며 위스키를 수집합니다.

전 날 잠이 들 때까지 아무 이상 없던 왼 발 엄지발가락이 너무 아파서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통풍이었다. 그때는 통풍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통풍과 함께 살게 된 지 어언 반년이 다되어 간다. 통풍이 내게 찾아온 가장 큰 원인은 아마 과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았지만, 한 번 마시는 날에는 취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1차에서 그치는 법이 없었고, 항상 2차, 3차, 4차, 심지어 첫 차 탈 때까지 마셨다. 따라서 술 마시는 날의 결말은 항상 두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술 마시다 잠이 들거나, 모든 걸 게워내고 잠이 들거나.

@ Imani-Bahati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돌이켜 보면 나는 술 그 자체를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술 보다 더 좋아했던 것은 아마 술 마시며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진솔한 대화와 두터워지는 관계들, 한껏 격앙되기도 늘어지기도 하며 감정의 파도에 몸을 맡겨 넘실거리는 행동들, 평소였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용기에 취기를 덧 입혀서 세상을 다 가진 듯 마음껏 즐기는 시간들이 좋았다. 하지만 내 몸은 이제 술을 마실 수 없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 만약 절제를 못하고 예전처럼 마셨다가는, 통증의 왕 통풍이 재발할 것이 분명하다.


통풍과 관계없이 술자리는 왕왕 생긴다. 처음 아프기 시작했을 때는 통증의 기억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술자리에 가더라도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술자리에 가게 된 날에는 함께 갔던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마치 다른 온도와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는 기분이 든다. 혼자만 외딴섬에 있는 기분이었다. 따라서 웬만하면 술자리를 피하게 되었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날에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술을 피해 다닐 수는 없었다. 고작 통풍 때문에 내가 관계하고 있던 사람들을 잃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술을 즐겨야만 했다. 하지만 술을 즐기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규칙은 매우 간단한데, 절대 과음하지 않는 것이다. 담당 의사와도 충분히 상담했다. 꾸준히 약을 복용한다면, 가끔 한 잔 정도 마시는 술은 괜찮다는 허락도 받았다.

@ Terry Vlisidis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소주 기준으로 3병 이상을 마시는 내게, 1~2잔의 소주는 마시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단 한 잔을 마시더라도 오랫동안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서 마실 수 있어야 했고, 양을 늘리 수 없으니 질을 높여야 했다. 후보로 떠오른 술은 와인과 위스키였다. 와인은 내 취향에 잘 맞긴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와인은 개봉하면서부터 계속해서 맛과 향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설프게 보관하려 하다가는 식초처럼 변해버리기 쉽다. 와인은 한 병에 750ml다. 나눠 마시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혼자 마셔야 하는 상황에서는 소주 2병을 마시는 것과 비슷하다. 통풍이 생기기 전의 내게는 와인이 더할 나위 없는 장점만 있는 술이었지만,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위스키는 대체로 내가 처한 상황과 기준에 부합하는 술이었다. 위스키는 향을 마신다고 할 정도로, 음미하는 술이다. 따라서 오랜 시간을 마실 수 있는 데다, 개봉하고 다시 뚜껑만 닫아두면 상하는 일도 없다. 또한 높은 도수의 술이기에 한 잔만 마셔도 취기를 가져다준다. 심지어 어두운 조명과 재즈 음악 같이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덕분에 함께 하는 사람과 더욱 찐득한 대화가 가능하고, 분위기와 음악에 몸을 맡겨 넘실거림도 가능한 데다, 다양한 향과 맛을 느끼며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이제 막 입문하는 입장에서 세밀한 맛과 향을 느끼지 못하지만, 점차 마셔가며 깊이를 더하면 될 것이라 문제 될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내게 완벽한 술이다. 단 하나만 빼고.


위스키는 완벽한 만큼이나 가격이라는 큰 벽이 있다. 더군다나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잔 술로 마시기 좋은 위스키 가격이 폭등했다. 소주는 한 병이 2천 원 미만이지만, 웬만한 위스키는 한 잔이 2천 원을 훌쩍 넘는다. 이는 심지어 대형마트나 편의점 가격 기준이다. 음식점이나 위스키 바에 가서 마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주는 대략 한 병에 5천 원 남짓이겠지만, 위스키는 한 잔에 1만 5천 원이 넘어간다. 만약 더 오래 숙성된 고급 위스키라면 한 잔에 3~5만 원 이상도 생각해야 한다.

@ Adam wilson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도저히 위스키 바에서 마실 엄두조차 나지 않기에 나는 대형 마트에서 위스키를 병 째 사 온다. 처음 위스키를 구매하면서 충동구매는 아닌지, 과소비는 아닌지, 동경하는 내 삶의 방식과 어긋나지 않는지 등을 고민했다.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을 때, 즉 절제할 때 비로소 냉철한 이성이 강인한 힘을 가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위스키는 이 사실을 비웃기라도 하듯 찬장에서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위치에 따라 권력의 정도를 본능적으로 느낀다는 사실에 위스키를 찬장에서 꺼내 식탁 위에 두고서 한참을 내려다봤다. 내려다본다고 해서 내가 위스키를 비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최소한으로 절제하는 삶의 방식인 미니멀리즘을 동경한다. 세상에 갖고 싶은 것이 너무 많더라도, 잠시 사용하거나 내게 찰나의 호기심을 주고난 뒤 방치될 물건이라면 사지 않는다. 그것이 내 삶의 방식이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마음먹으며 옷을 구매하는 것도 줄였다. 같은 모양, 색깔, 용도의 옷이 이미 집에 있으면 사지 않는다. 옷을 좋아하던 내게 미니멀리스트로 산다는 것은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옷뿐만 아니라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인지, 구매하고서 싫증을 느끼지는 않을지, 한 번 구매하면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의 조건을 심도 있게 고민하고 나서 최소한으로 소비한다. 작은 생필품마저도, 아무리 값싼 물건이라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묻고서 구매를 한다.


그런데 값 비싸고, 마시고 나면 곧바로 사라져 효용도 떨어지는 데다가, 통풍 환자에게는 꼭 필요치도 않은 위스키를 구매한다. 심지어 수집하기 시작했다. 처음 위스키를 구매한 지 한 달 남짓한 시간에, 나는 위스키를 8병이나 사버렸다. 미니멀리즘을 동경하던 나는 이제 찬장에 위스키를 줄 세워 놓고서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재료, 숙성 방법, 제조하는 나라, 블렌딩 등 위스키를 하나만 사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종류와 제품이 있고, 따라서 최소한으로 소비를 할 수 없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더욱 다양한 종류의 위스키 맛을 보고 싶었다.

@ Bench Accounting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소주와 맥주에서 위스키로 바꾼 결정적 이유는 통풍 때문이긴 하지만,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하며 술자리를 자주 가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잔잔한 음악과 어둡지만 그 속에 밝게 타는 양초를 바라보며 위스키를 마신다. 술을 왕창 마시던 때와 비교해서 혼자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늘었다. 내가 미니멀리즘을 통해 진정 추구하려 했던 삶은 불필요한 소비와 행동을 줄여서 단순하면서도 깊은 생각에 빠지기 위함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줄여서 잡념을 줄이고, 삶도 단순해지길 기대했다. 단순한 삶 속에서 작은 변화에도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었다. 위스키는 사색에 빠지기 좋은 술이었고, 내 삶은 위스키를 만나며 실로 단순해졌다.


또한 미니멀리즘은 가격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최소한으로 소비를 할 뿐, 무조건 저렴한 물건을 사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니멀리즘은 절약하는 삶으로 치환할 수 없고, 미니멀리즘은 자린고비가 아니다. 최소한으로 소비해야 한다는 고집이 미니멀리즘에 대한 본질을 왜곡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통풍환자가 되어 값비싼 위스키를 마시며 미니멀리즘의 본질에 더 가까워졌다. 과소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더욱 사색하고, 오감을 활용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위스키는 좋은 도구가 되었다. 나는 통풍환자지만, 미니멀리즘을 동경하지만, 위스키를 수집하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 한 잔 할래요? 아니, 마셔 주세요. 제발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