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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n 07. 2023

조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불편했습니다.

나는 두 살 터울인 동시에 연년생의 남동생이 있다. 결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를 만큼 내가 어렸을 때, 막연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면 그래도 동생보다는 내가 먼저 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시대의 사고방식에서는 응당 그래야만 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아기도 내가 먼저 낳았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동생 부부는 아기를 낳았고 나는 삼촌이,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난 결혼조차도 하지 못한 채.


동생 가족의 임신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태어날 아기의 초음파 사진에서 동생과 똑 닮은 모습을 보았을 때, 함께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서 배가 불러온 제수씨의 모습을 보았을 때 등 아기가 태어날 것을 상상은 했건만 전혀 적응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신혼집에 초대했었던 동생의 모습도 무척이나 생소했지만, 아기가 태어난 현재의 모습은 더욱 낯설다. 그런데 태어난 아기를 실제로 마주한다면, 낯설기만 할 것 같기보다는 오히려 가깝게 느껴질 것 같다. 그 복잡 미묘한 경계선에서 나는 혼란스럽다.


동생이 보내주는 조카의 사진들과 영상들을 볼 때면, 조카가 마냥 귀여우면서 예쁘다. 동생이 낳은 아기라고 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무언가 가슴속에선 설명할 수 없는 몽글몽글한 느낌도 든다. 때로는 품에 꼭 안아서 아기의 체온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며 키웠던 부모님의 것과 같은 느낌일까? 사촌 동생의 갓난아기 때를 봤었던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과 감정들에 젖어들게 된다.

ⓒ  Nik Shuliahin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이렇게 소중한 존재를 세상에 데려와 주었음에도, 동생에게 내 온 마음을 다해서 축하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조카가 생겨서 내게 손해가 된다거나 나쁜 점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마음속에 자리 잡은 못난 이 마음은, 무언가 축복을 방해하는 이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고민한다. 아마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당장이라도 해내고 싶지만, 현실의 나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일찍이 하고 싶었던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내 마음속으로부터 느끼는 자괴감과, 나는 아직 하지 못했던 결혼을 동생은 이미 했다는 비교에서 느끼는 열등감, 손주를 보고 환하게 웃는 아버지를 보며 느끼는 미안함 등이 내 안과 밖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이처럼 복합적 감정들은 동생의 아기가 태어났다는 응당 축복받아 마땅한 사실에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느꼈다는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도록 했다.


이러한 내면의 감정들이 무엇인지를 몰랐을 때는, 불편함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해서 고민을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기인한 불편한 감정인지를 알아내지 못했을 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에 민낯을 드러내며 마주해야 했다. 고민을 회피했을 때는 긍정적 감정으로 승화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불편함을 직면하게 되고 나서 오히려 크게 한 발자국 내디딜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결혼이라는 과업을 하지 못 했음을 인정하고, 시간이 지나며 내 삶이 추구하는 바가 달라졌음을 인식해야 했다. 아직 결혼이라는 과업이 달성하고 싶은 목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저 달성하기 위해서 목표지향적으로 해야 하는 과업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내게 결혼은 목적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아버지를 포함해 지인들이 결혼에 대해 권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이 꼭 필요하다면, 이제까지 하지 못했던 것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앞으로도 도움이 될 것이다.

ⓒ  Nathan Dumlao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또한 동생의 결혼에서 나를 분리해야만 했다. 나와 동생은 각자의 삶이 있고, 각자가 추구하는 삶이 다르다. 동생뿐만 아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삶이 있다. 내가 일과 삶에서 경험을 쌓으며 최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가 중심이 되는 것이다. 나를 남과 비교하게 되는 순간, 남의 삶에 기웃거리며 살 수밖에 없다. 상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대가 쟁취한 것은 무엇인지를 항상 염탐해야 한다. 내 삶에 남을 가져오는 순간, 나는 없고 상대만이 존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며 미안한 감정은 느끼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것은 내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아버지는 아마 내가 결혼해서 가족과 지내면서 가지는 특별한 감정들, 가족이 생김으로써 느끼는 안정감들, 혹여나 손주라도 생기면 얻게 되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행복들을 갖길 원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늘 내 선택을 믿고 존중했다. 최근에 내가 가지는 행복은 결혼보다는 다른 곳에 있다. 이를 테면 일찍 은퇴하고서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창작하는 삶과, 최소한의 소비를 통해서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을 행동하는 삶, 불평등한 자본주의의 사회 속에서 조금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삶 등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


불편함을 느꼈다고 해서 축하의 마음을 아예 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생에게 축하의 의미로 작게나마 용돈도 줬고, 아기 사진들을 볼 때마다 긍정과 사랑의 말들을 전달했다. 심지어 조카의 내복이나 기저귀 같이 필요한 것들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늘 굴뚝같다. 비록 내가 낳은 아기는 아니지만,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단 한 번도 거짓이었던 적이 없다. 태어남과 동시에 내게 성찰의 힘을 주었던 조카에게 온전한 축복의 힘이 조카에게 잘 전달되어, 그도 스스로의 삶을 힘차게 살아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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