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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n 09. 2023

아기의 그 탐스러운 볼을 만지고 싶지만

나는 과연 아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나는 아기를 보는 순간, 그 탐스러운 볼을 만지고 싶다. 아기의 탐스러운 볼은 그의 부모에게 오랫동안 안겨 있거나 업혀 있다 보니 더웠는지 불그스름 해지기도 하고, 짓 눌려서 자국이 남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짓눌림 속에서도 부드러우면서 말캉한, 이가 없어도 힘껏 빨아낸 모유와 이유식 덕분에 보름달처럼 차오른 그 볼을 만지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탐스러운 볼 그 자체에 대한 탐욕이거나 볼륨감에 대한 집착은 아니다. 왜냐하면 볼을 만지고 싶은 것 외에도 그 아기를 안아보고 싶고, 아기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싶고, 아기의 관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늘 함께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태어난 지 100일이 된 조카나, 주변 사람들의 아기를 볼 때면 내가 낳은 아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고,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머릿속에서 아기는 사라진다. 다른 사람들처럼 조카 바보가 돼서 월급의 일정량을 갖다 받치게 되는 특성이 내게는 없다. 문득 '내가 아기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 Aditya Romansa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혹시 '내가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인식을 원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는 혼자 있는 경우가 잘 없다. 항상 부모나 보호자 등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 따라서 아기와 교감하려고 하면 보호자와도 소통할 수밖에 없다. 아기와 눈을 맞추고, 내 손가락보다도 작은 아기 손에 내 새끼손가락을 쥐어주고,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내면서 아기의 시선을 끌어 직접적인 교감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아기의 보호자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다. 심지어 내가 아기에게 몇 살인지를 물으면, 그의 보호자들은 마치 아기가 빙의된 듯이 목소리를 변조하며 "100일 됐어요."라고 답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아기의 보호자들에게 '내가 아기를 좋아하는, 소위 말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이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정다감하며 좋은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족 단위의 구성을 넘어 사회 속에서 관계하며 살기 때문에 내 아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아기까지 보호하고 호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내 아이도 다른 사람들의 보호 안에 안전하게 자랄 수 있다. 나라나 문화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마 다른 사람들의 아기를 호감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고 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닐까 싶다. 나도 아기를 좋아한다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그들의 보호자와 안전의 신뢰를 쌓아간다.


따라서 아기의 보호자와 아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말과 행동이 더 조심스럽다.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생길지도 모르는 아주 작은 악영향조차 미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나는 아기의 보호자들 앞에서 웬만하면 아기에 대한 칭찬은 하지 않으려 한다. 험담은 당연히 하지 않지만, 칭찬도 특정한 잣대를 기준으로 삼아 아기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필히 수반된다.


예를 들어 "아기의 눈이 예쁘네요."는 눈 크기나 눈동자 색깔, 눈 모양 등 나만이 가지는 특정한 기준에 따라 평가하게 되고, 좋고 나쁨이 정해진다. 그래서 "아기의 눈동자가 갈색이네요."처럼 주관적이더라도 최대한 판단하지 않으려 하거나 되도록이면 객관적으로 표현하려 노력한다. 혹여나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보호자가 아기에 대해 일말의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되면, 그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보호자와 소통에 더욱 조심하고, 아기에게 다가가고 싶은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서 눈으로만 아기를 보려고 한다. 이것이 내가 보호자들과 안전의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이다.

ⓒ Helena Lopes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하지만 보호자들과의 관계를 조심하거나, '아기를 좋아하기에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얻는 것으로만 내가 아기에게 자꾸만 끌리는 이 마음을 전부 설명할 수가 없다. 아기의 보호자가 내게 아기를 잠시 맡기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분유를 타는 것과 같이 무언가에 집중해야 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아기와 둘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그와 시간을 보내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다. 보호자가 멀어짐으로 인해서 아기가 불안함을 느끼지 않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한다. 이를 테면 어화둥둥 연신 비행기를 태우거나, 목소리 톤을 높여서 정신없게 한다거나, 그 마저도 안되면 아기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쥐어 준다. 아기를 안아본 적이 많이 없었던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기가 무거워도, 그래서 팔이 아프더라도 출항한 비행기 운행을 멈출 수 없다.


심지어 나는 청결에 약간의 강박이 있다. 가령 안겨있던 아기가 내 어깨에 침을 흘려 더럽혀진 옷으로 인해 그 순간에는 기분이 안 좋을 수 있지만, 옷보다는 아기의 침을 먼저 닦아준다. 아기의 침 정도는 강박에도 강함을 보인다. 그저 아기가 나를 바라보고 웃거나, 내게 안겨 있는 순간에는 별 다른 생각 없이 온전히 아기에게만 집중한다. 아기는 특별한 스킨십 없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내가 아기를 진실되게 좋아한다는 쪽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아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 아닌 것 마냥 왜 내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지는 것일까? 아마도 아기와 내가 살 부딪히며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기를 좋아한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함께 살아가며 가지는 추억들이 부족해서다. 심지어 아기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한정적이다. 내가 특정한 행동을 했을 때, 아기의 상호 작용은 울고 웃는 것 둘 중에 하나로만 표현한다. 따라서 아기와의 복합적인 감정을 공유하고, 아기와 내가 서로를 특별한 존재로써 추억을 쌓아가기 어렵다. 더군다나 매일은 아니더라도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라면, 그 아기가 내게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 Picsea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내 동생의 유전자 힘은 놀라울 만큼 강했다. 조카는 특히나 동생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에 얼굴만 보더라도 당연히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아직 가족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그저 아기로서 귀한 존재라고 인식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카가 100일이 되기까지 실제로 본 적은 두 번 밖에 없었다. 사진은 동생이 매일 같이 보여주지만, 사실상 남처럼 느껴지는 것이 나만 느끼는 이상한 감정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동생의 아기지만, 가끔 보게 되는 조카보다 매일을 한 침대에서 같은 베개를 베고 같이 자는 강아지가 내게는 더 가족 같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결국은 내가 아기를 좋아하는 척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아기라는 존재에 분명히 호감이 있다. 그게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란 사회적 인식 때문인지, 아기를 좋아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유전적 선호인지, 단순하게 아기를 좋아하는 개인적 호감인지 구분할 수 없다. 내가 아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하지만, 아직은 아기가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오지 않았던 이유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이쯤에서 한 가지 다행인 사실은 앞으로 조카와 특별한 유대감을 쌓아서 남이 아니라 가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이다. 조만간 조카를 보게 되면, 그 탐스러운 볼을 마음껏 탐닉하는 것을 넘어 그의 가족이 되어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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