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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n 29. 2023

비는 사랑을 싣고

당신의 비에는 사랑이 있습니까?

비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비는 '슬픔'의 감정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슬픔뿐 아니라 대체로 어두운 감정에 빠지기 쉽다고 느낀다. 가령 짜증이 쉽게 난다거나, 숙연함이 오래 지속되거나, 활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하루를 보낸다. 심지어 나는 반곱슬 머리라서, 비가 오는 날에는 애써 시간과 공들여 말린 머리가 폭탄 맞은 것처럼 금세 지저분하게 변한다. 부스스한 머리가 신경 쓰이고, 신경 쓰여서 자꾸만 거울을 보게 되고, 거울을 보고 짜증이 단전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 Arisa Chattasa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머리뿐 아니라, 비에 젖은 옷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마찬가지다. 스마트 폰을 보면서 앞을 보지 않으며 걷다가, 물 웅덩이라도 잘못 밟으면 하루종일 목욕탕에 불린 것 같이 쭈글거리는 발가락으로 하루를 보내야 한다. 또한 일을 하려고 책상에 앉아서 키보드에 팔을 얹으면,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유리에 쩍쩍 달라붙는다. 유리가 내 체온으로 인해 뿌옇게 변해버리면, 금세 지저분해진다. 나는 약간 강박이 있는데, 지문이 덕지덕지 남은 책상 유리를 다시 닦아야만 한다. 이처럼 비가 오는 것은 내게 스트레스 투성이다.


그중에서도 제일은 강아지와의 산책이다. 나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에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비가 오면, 비가 오지 않는 시간에만 산책을 할 수 있다. 즉, 일상이 무너진다. 강아지는 비가 와도 산책을 나가자고 낑낑대고, 나도 산책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하루를 산다. 그래서 비라도 오는 날에는 비가 잠시 오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라도 산책을 다녀오려고, 출퇴근 전후로 핸드폰 날씨 화면의 새로고침을 10분 단위로 한다. 

ⓒ Matthew Henry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더군다나 비가 오기 전후로 산책을 다녀오면,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된다. 강아지를 씻기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강아지는 사람과 다르게 자주 씻으면 오히려 피부병에 걸린다. 씻겨 주더라도 털을 잘 말려줘야 하는데 드라이어의 소리가 무서운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가 잘 없다. 나도 빠르게 말려줘서 강아지가 받게 될 스트레스를 줄여주고 싶지만, 폭삭 젖은 털들은 사람 머리보다 모량이 많은지 훨씬 더 오래 걸린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비가 사랑을 동반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산책을 나섰음에도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한 노부부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정확하게는 그들은 따로 또 같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마음 급한 할아버지와 세상 태평한 할머니의 발걸음 속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이게 경상도 남자지'. 혹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놔둔 채 너무 빨리 가시지는 않을까 걱정까지 해야 했다.


그러다 할아버지는 뒤로 돌아서 할머니에게 갔다. 갑자기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메고 있던 가방을 빼앗았다. 내가 놀랄 틈도 주지 않고서는 할머니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비닐봉지까지 빼앗았다. 할머니는 말했다. "와 이라노".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입고 있던 비닐 소재의 조끼를 벗어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도 역시 감사의 인사는 하지 않은 채 할아버지의 무채색 조끼를 걸쳐 입었고, 할아버지는 휘황찬란한 할머니의 가방을 둘러메었다. 그 노부부에게 옷과 가방, 검은 비닐봉지가 매치된 패션은 하등 중요치 않았다. 그들을 보면서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나는 그 노부부의 사랑을 느끼며 산책했다.

ⓒ James X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그 직후에 만난 사람들에게서도 비는 사랑을 동반했다. 이번에는 한 젊은 남녀가 내게로 걸어왔다. 갑작스레 내리기 시작한 비에 그들도 우산은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 위에 큰 손을 올려서 그녀의 머리가 젖지 않게 했고, 그녀는 그의 허리를 감싸고 빠르게 이동했다. 다른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전동 휠체어를 탄 남자와 이번에는 우산을 쓴 여자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우산은 하나밖에 없었는지, 여자는 자신이 쓰지 않고 그에게 우산의 지분을 90% 내어줬다. 스스로의 고통을 감내해도 괜찮은, 스스로의 이익을 포기해도 상대가 편익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한, 나보다 상대가 더걱정되고 애틋한 그들의 사랑이 비와 함께 있었다.


내게는 짜증과 스트레스, 슬픔을 동반하는 비가 어쩌면 저렇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애틋한 사랑을 동반하는지 그저 부러웠다. 노부부를 보면서 나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저렇게 늙어야지 다짐했고, 젊은 연인을 보면서 과거 이십 대의 옛사랑을 떠올리기도 했고, 일방적으로 우산을 씌워 주기만 했던 사람들을 보면서 헌신적인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도록 했다. 나만 사랑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할 무렵에, 이익을 재고 따지지 않아도 되는 헌신적인 관계를 생각하니 내게도 사랑의 상대가 떠올랐다.


그 상대는 오히려 내게 스트레스 상황을 갖게 했던 강아지였다. 비가 오자 산책하지 못해 스트레스가 차곡히 쌓일 강아지를 먼저 생각했고, 비를 맞으며 산책하면 혹여나 피부병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했고, 산책하지 못하게 되며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하지 않던 장난감 놀이를 하며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비는 내게도 애틋한 사랑을 동반하고 있었다.


내게 비는 '슬픔'의 감정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남들에게는 있는 것 같았던, 동시에 내게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사랑의 애틋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갑작스레 내린 비를 혼자 맞이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비를 바라보는 관념을 바꾸고, 나아가 스스로만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귀한 사랑을 비가 오지 않아도 삶에서 쌓아 나가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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