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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l 10. 2023

침착맨은 대단한 철학자임이 틀림없습니다.

'오히려 좋아'라는 절대적 가르침

주말 아침에는 루틴에 따라 9시 알람을 듣고 눈을 떠야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 채 8시에 잠에서 깼다. 나는 바로 다시 잠들어야만 9시까지 잘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목이 말랐고 냉장고로 걸어갔다. 자칫하다 정신이 들면, 마저 잠에 들기 어려워서 혼미한 상태를 최대한 유지한 채 살며시 걸어갔다.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서 병째로 물을 마시고, 병을 내려놓으려는데 냉장고 안의 광경을 보고는 마치 생생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후에 꿈과 현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내가 완전히 깨지 않기 위해 조심히 걸어갔던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는 것을 조만간 깨닫게 된다.


물 병을 놓아야 할 자리에 정체를 모르는 갈색 액체가 있었다. 그것은 냉장고에 있던 콜라나 사시미 간장으로 보기에는 조금 연한 갈색이었고, 찍어 먹어보지 않았지만 물병 바닥에서 다시 떨어지는 속도나 점성으로 보아 묵직한 바디감을 선보일 것 같았고, 냉장고의 차가운 온도 때문인지 특별한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아직 몽롱한 상태에서 맨 윗 줄의 음료칸에 구현된 제주도 협재 해수욕장의 물 높이처럼, 온 가족이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얕은 갈색 수영장을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현실인지 꿈인지를 몰랐다.

ⓒ Tingey Injury Law Firm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잠을 더 자고 싶은 몸뚱이와 절대 방치하면 안 된다는 뇌가 각각의 논리로 나를 설득하면서 내적 갈등을 펼쳐 보였다. 그러다가 음료칸 아래에 계란이 있던 곳을 봤는데, 거기로도 정체 모를 갈색 액체가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내적 싸움은 무의미했고, 지금은 갈색 수영장의 원인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스피드였다. 나는 마른행주를 가져와서 음료 칸에 있었던 식품들을 하나씩 닦으면서 싱크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꿈이 아니고, 현실임을 드디어 알아차렸다.


이것을 치우면서, 주말이나 휴가 때만 즐길 수 있는 늦잠을 방해한 갈색 액체에게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일 재밌는 것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 했다. 내 분노의 아우라가 침실에 있던 강아지에게도 전해졌는지, 나는 아무런 말도, 욕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옮기고 있었지만, 강아지는 나를 구경하러 왔다. 혹시 정체 모를 이 갈색 액체를 강아지가 먹지는 않을까, 다시 침실로 가라고 다급하게 쫓아내며 냉장고 안에 있는 식품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식품을 어느 정도 옮기고 나니, 다른 곳으로 더 침투하기 전에 마른행주로 냉장고를 닦아야만 했다. 닦으면서 갈색 액체의 정체를 알아냈다. 어제 정육점으로부터 할인한다는 문자를 받고 사러 갔었던, 돼지양념갈비였다. 3근에 1만 원으로 할인했고, 나는 1인가구였기에 3근만 사 왔다. 3근을 한 번에 먹을 수 없어서, 다시 비닐을 묶어 냉장고 맨 위칸에 놔뒀다. 어떠한 과학적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종종 냉장고 안에서 양념이 넘쳐흐르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어서 혹시 몰라 검은 비닐봉지도 한 겹 추가해서 보관했다.

ⓒ Anton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그러나 검은 봉지를 덧 씌운 내 노력이 무색하게도, 검은 봉지마저도 뚫고 흘렀다. 나는 냉장고 문 쪽 전체를 청소해야 했다. 주말 늦잠을 방해한 것도 모자라서, 내 선견지명의 노력마저 무시한 돼지양념갈비가 부단히 미웠다. 심지어 제대로 정신도 못 차리고 눈곱도 떼지 못한 채, 냉장고 청소를 하고 있는 것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무언가 예측 불가능한 전환이 필요했다.


그 순간에 유튜버인 '침착맨'이 항상 외치는 문장이 떠올랐다. "오히려 좋아". 나도 그를 따라 소리 내서 크게 말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냉장고를 청소하는 내 모습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신축 빌라로 독립하면서 이 집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전자기기들은 새 제품이었다. 그때 나는 신이 나서 새 냉장고의 비닐도 뜯고, 청소도 했었다. 하지만 4년 간 살면서 한 번도 냉장고 청소를 할 일이 없었는데, 오히려 이번 기회에 냉장고 청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갈색 액체의 찐득한 점도가 마른행주를 통해 손에 닿았을 처음에는 불쾌하기만 했다. 하지만 마법의 문장을 외치고 나서의 지금은 그 정체를 어느 정도는 예리하게 추리하고 있었다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어제까지 장마로 토요일 루틴인 빨래와 집 청소를 못했다. 어제 못한 것과 오늘 해야 하는 화장실 청소까지 해야 됐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평소보다도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난 덕분에, 예상치 못하게 냉장고 청소를 한 시간이나 했음에도 11시 30분에 모든 청소 루틴을 끝낼 수 있었다. 심지어 독립한 지 4년째에 접어들지만 집들이를 포함해서 배달해 먹은 것이 손꼽는다. 그만큼 항상 요리를 해 먹으니 냉장고를 자주 들여다보는 편이다. 하지만 냉장고 청소를 하지 않았더라면 하마터면 유통기한이 지날 뻔했던 식재료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 Dmitry Ratushny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침착맨의 '오히려 좋아'라는 문장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그 효과도 극명했지만,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내 삶을 바꾸는데 소요되는 시간이었다. 마법의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 그 순간, 바로 긍정적인 감정의 환기가 찾아왔다. 이제껏 철학과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경험과는 달랐다. 내가 가장 동경하는 칸트의 철학은 곱씹으며 마음속 깊은 곳에 넣어두고 싶은 것이라면, 침착맨의 철학은 스트레스 상황에 직면한 순간 꺼내고 싶은 것이 되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단순히 돼지양념갈비를 꽉 묶어 보관하지 않아서 냉장고 청소를 한 사건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전에 비해 불안한 미래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여전한 장시간 노동, 초 연결되는 사회지만 오히려 점차 줄어드는 소통으로 느끼기 쉬운 군중 속의 고독 등 현대 사회에 스트레스 요인들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휘몰아쳐 오는 스트레스를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을 살아가며 넘실대는 파도처럼 밀려들어 올 스트레스에 대비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어막 하나쯤은 필요하다. 침착맨의 가르침으로, 그는 내게 그저 수많은 유튜브 크리에이터 중 한 사람이라기보다 대단한 철학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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