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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l 17. 2023

트레이더스 치킨을 다시는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매우 잔인하고 폭력적인 음식이거든요.

강아지와 둘이 사는 내게, 트레이더스에서 파는 두 마리 치킨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내가 푸드파이터나 먹방 유튜버라면 또 모르겠지만, 햄버거 4개를 먹는 대식가인 나도 트레이더스의 두 마리 치킨은 다 먹어본 적이 없다. 일단 양을 떠나서 기름진 치킨이 물려서라도 다 먹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무지막지한 양으로 유명한 트레이더스 치킨을 종종 사 먹는다. 두 마리가 상하기 전에 다 먹어치울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강아지에게는 한 입도 주지 않고 말이다.


일단 처음 사 왔을 때는 순정의 상태로 후라이드 치킨을 먹는다. 핑크 솔트와 후추의 조합은 육고기에 언제나 옳다. 뿐만 아니라 BHC에서 후라이드 치킨을 시켰을 때 먹지 않았던 허니 머스터드소스나,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레시피로 만들어 둔 양념치킨 소스 등을 연합해서 두 마리 중에 한 마리 정도를 먹어 치운다.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도 소면까지 야무지게 말아 돼지국밥 한 그릇을 다 먹어치웠으니, 이 정도쯤은 내게 일도 아니다.

ⓒ Guillermo Nolasco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하지만 프랜차이즈에서 파는 치킨과 달리 튀겨진 닭이 크기 때문에, 한 마리 정도를 먹고 나면 며칠간은 치킨 생각이 싹 사라진다. 만약에 남은 치킨을 그대로 두면 상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남은 치킨을 해체해야 할 때가 왔다. 치킨 뼈를 발골할 때, 치킨 껍질과 튀김에 붙어 있는 살을 따로따로 분리하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껍질이나 튀김만 있으면 너무 기름지고, 살 부분만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으면 데워 먹을 때 수분이 날아가서 퍽퍽해지기 쉽다.


대체로 분리해 둔 것은 치킨볶음밥과 치킨마요 덮밥을 해 먹는 데 사용한다. 후라이드 치킨을 원 없이 먹고도 아직 두 번이나 치킨을 더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배도 마음도 든든해질 때쯤이었다. 든든함으로 들뜨다 못해 천장으로 날아갈 기세였던 마음이, 든든한 만큼 죄책감으로 바뀌어 방바닥까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죄책감으로 나는 생명의 삶과 죽음에 대해 고찰해야만 했다. 고작 치킨쪼가리 먹으면서 무슨 삶에서부터 죽음까지 논하느냐 생각할 수 있다.


죄책감을 느꼈던 이유는 치킨볶음밥과 치킨마요 덮밥을 해 먹기 위해서는 계란이 필요하다. 아직 삶 자체를 시작하지도 못한 계란과 원하지 않았음에도 삶이 끝나버린 닭을 함께 먹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은 다른 생명을 해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죄의식으로부터 언제나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닭이라는 개체의 시작과 끝을 전부 내 의지로써 해한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내게 치킨볶음밥과 치킨마요 덮밥은 맛있다는 이유로는 더 이상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와 생명이나 감정을 지닌 존재로서의 동물권에 대한 신념으로 점심 비건을 시작한 지가 1년이 넘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을 만큼이나 가혹하게 줄여 왔다는 사실만으로 치킨마요 덮밥 앞에서 느낀 내 죄책감을 덜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점심뿐이지만 채식을 힘들게 지켜왔던 만큼이나 죄책감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나는 한 개체의 시작과 끝을 모두 먹을 수 있을까. 그리고 먹어야만 하는 것일까.

ⓒ Tengyart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물론 엄밀히 따지면 계란과 치킨 모두 삶의 상태가 아닌 죽음의 상태로 내게 도착했다. 그렇게 합리화한다고 해도 역시나 내 죄책감은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17,890원을 주고 산 두 마리 치킨은 공장식으로 닭을 키워 팔았기 때문에 손쉽고도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계란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공장식으로 키운 닭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내가 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맴돈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 동식물의 죽음을 선택해도 되는 것일까. 단지 내가 그들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지배하는 종의 개체로 태어났다는 정당성 하나 없는 이유다. 이것보다 현재 내 생존의 상황을 명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되물어야만 했다. 나는 아직 죽음에도 이르지 못해서 그것이 어떠한 고통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생명의 죽음은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인다. 예측컨대 아마 이 굴레와 죄책감은 평생을 따라다닐 것이다. 언제나 이 죄책감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그 크기라도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 가령 식욕의 노예가 되어서 더 많은 죄책감을 느낄 일을 하지 않도록, 죄책감의 칼날을 날카롭게 유지해야만 한다. 다른 생명들의 삶과 죽음을 해하면서 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항상 당연한 것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죄책감의 크기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식사를 하며, 최대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채식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다. 처음부터 완전한 채식으로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하루 두 끼 먹는 식사 중에 한 끼를 채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에는 육식을 할 수도 있지만, 점심 식사만큼은 채식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점심은 샐러드와 과일, 포만감을 위해서 견과류를 먹는다. 또한 물을 자주 먹어서 배고픔을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식사 시간 외에 간식은 일절 먹지 않는다.


다만 점심으로 먹는 견과류의 식물성 단백질 만으로는 필수 영양분이 부족할 것이라고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말했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활동적인 나이기 때문에, 동물성 단백질과 같은 필수 영양소 섭취가 아직은 필요하다. 쓰러질 만큼만 먹지 않으면서도, 건강을 지킴과 동시에 내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섭취가 가능하다. 물론 채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을 보자면 유혹에 빠지고 쉽고, 추운 겨울에는 샐러드에 드레싱을 먹으면 오히려 춥기도 하고, 채식 이전에 먹었던 것과 비교하면 절대적으로 맛이 없다.

ⓒ Anna Pelzer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그러나 채식을 하면 좋은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오랜만에 나를 보는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재용아, 살 많이 빠졌네?". 체중계가 없어서 정확한 몸무게는 모르겠지만 지나친 술로 인해 사라졌던 얼굴의 윤곽이 생기기 시작했고, 과일은 죽어도 입에 대지 않았던 내가 제철 과일을 찾아 먹으며 비타민도 섭취할 수 있고, 내가 추구하는 삶과 현재 상황이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간혹 주변에서 채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종종 있지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내 삶에 명확한 정체성과 주변과의 관계 증진은 덤이다.


따라서 이제는 아쉽지만 트레이더스의 두 마리 치킨을 사 먹지 못할 것 같다. 두 마리를 다 먹을 자신도 없고, 다 먹는다는 것은 내 생존과는 무관한 욕망의 역역이기 때문이다. 남겨서 다른 요리를 해 먹는다고 하더라도, 간편하면서도 맛있게 해 먹을 수 있는 치킨볶음밥이나 치킨마요 덮밥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확신이 없다. 거듭 말하자면 치킨볶음밥과 치킨마요 덮밥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해하는 매우 폭력적인 음식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에 나는 다시 먹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 내면을 향한 외침이자, 내 다짐을 지키기 위한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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