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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May 29. 2023

《피의게임》은 불공평합니다만, 현실은 공평합니까?

《피의게임》이 시작할 때, 중저음으로 변조된 남성의 안내 음성이 나온다. "피의 게임은 매우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인 게임입니다". 서로를 사뭇 경계하며 멋쩍은 미소와 어색한 인사만을 나누던 생존게임 참가자들은 그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긴장하기 시작한다. 《피의게임》은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들과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이라는 조건이다.

ⓒ 피의게임 of Wavve. All right reserved.

참가자는 게임을 시작할 때, 사용가능한 게임 머니를 사회에서 받았던 자신의 연봉에 비례하여 지급받는다. 매일 게임이 진행되고, 그 결과에 따라서 해당 회차의 우승자와 탈락 후보자가 결정된다. 문제는 게임 머니로 인해 우승자와 탈락 후보자가 바뀔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다. 심지어 탈락 후보자를 결정하는 과정에 투표가 진행되는 데, 탈락 후보를 결정하는 투표권 마저 게임 머니로 살 수 있다. 게임이 아닌 현실의 사회로 바꿔보면 탈락은 죽음과 같다. 즉 게임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다. 기본적인 생존조차 불공평한 것이 《피의게임》이다.


생존게임이 불공평하다는 것은 게임의 주요 능력에서도 알 수 있다. 게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크게 세 가지 능력이 중요하다. 순발력과 근력, 지구력, 공간 지각력 등 몸을 중심으로 활용하는 피지컬, 기억력과 게임을 이해하는 문해력, 빠른 연산력 등 두뇌를 중심으로 하는 뇌지컬, 다른 참여자들과 협동을 하거나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한 공감과 소통 능력, 현재를 판단하고 생존에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등 정치컬이 그 세 가지다.

ⓒ 피의게임 of Wavve. All right reserved.

《피의게임》에 참가자들은 세 가지 능력 중 특화된 자신만의 강점이 있다. 그러나 각각의 세 가지 능력 모두 불공평함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피의게임》 참가자 하승진은 뛰어난 피지컬로 NBA에서 활약했다. 그의 압도적인 피지컬은 무력 사용이 가능한 이 생존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요한 능력이다. 물론 NBA 선수가 되기까지 숱한 노력이 있었겠지만, 피지컬 능력은 유전적 요소가 많은 것을 좌우한다. 하지만 유전적 요소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타고나야 한다. 댄서인 넉스와 UDT 출신 덱스도 피지컬 능력이 특화된 참가자로 분류되지만, 하승진의 압도적인 피지컬과의 대결에서 쉽사리 우위를 보이기 어렵다. 유전적 신체의 강함은 선택한 것이 아님에도 다른 참가자들과 불공평한 게임을 하도록 만든다.


또한 흔히 하는 착각으로 원시시대의 인류가 현재의 인류보다 지능이 낮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현재 인류보다 지능이 떨어지거나 미개한 존재들이 아니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늑대와 함께 자란 '늑대 소년'이 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도 문명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현재 인류를 중심으로 '늑대 소년'을 평가했을 때, 그의 지능은 높지 않았다. 즉 현재 인류가 원시 인류에 비해 지능이 높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반대로 원시 시대에는 기억만을 담당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우리가 문자로 남기거나 컴퓨터로 하던 일들을 당시 사람들은 오로지 두뇌만을 활용했다.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 것은 문자나 교육의 방법으로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방법이지, 원천적인 지능의 문제가 아니다. 즉 뇌지컬이라는 능력은 교육이나 가정환경 등의 환경적 영향을 받는다. 뇌지컬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참가자가 불공평함을 보여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관계 맺음을 통해 스스로의 이익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정치컬은 간접적인 불공평한 상황을 만든다. 최후의 1인만이 상금을 차지하는 승자 독식 구조에서 참가자들은 무리 짓고 배신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신뢰를 기반으로 끝까지 팀을 이루면서 게임하는 참가자가 합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탈락이 곧 죽음으로 귀결되는 《피의게임》에서 참가자들은 비합리적 선택을 하기 쉽다. 게임으로 생존을 결정하기에 피지컬과 뇌지컬 능력이 가장 중요해 보이지만, 정치컬을 통해서 게임 자체를 의미 없게 만들고 상황을 통제하여 탈락 후보자를 만들기도 한다. 능력으로만 본다면 탈락했어야 하는 참가자가 오히려 압도적인 능력을 가진 참가자를 탈락시키는 과정에서 불공평함을 느낄 수 있다.

ⓒ 피의게임 of Wavve. All right reserved.

《피의게임》과 다르게《더 지니어스》나 《소사이어티 게임》은 같은 조건과 정보에서 게임을 시작한다. 《피의게임》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00M 단거리 육상 경기에서 다른 경쟁자와 달리 한 사람만 양쪽 발목을 묶고 달린다거나, 10Kg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달려야만 한다는 조건은 불공평하다. 모두가 같은 출발 지점에서 시작을 하고, 특정한 참가자에게만 부여된 특별한 제약 없이 경기가 진행되어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가진 능력 자체가 불공평한데, 같은 조건에서 진행되는 게임이라는 이유만으로 공평하다고 판단한 것은 내 착각이었다. 《피의게임》은 매우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인 게임으로 설정하며 현실성을 극대화했다.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같게 해서 어떠한 특정 능력이 생존에 유리한지를 관찰하는 것이 다른 프로그램들의 목적이었다면, 《피의게임》은 불공평함 속에서 게임을 진행해서 오히려 현실성을 더욱 높였다. 민주화되고 문명화가 일정 수준에 오른다면 공평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사실 모든 사람과 상황이 공평하다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A는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았고 시합 전날까지 고된 육체노동을 해야만 했다. 반면에 B는 체계적인 달리기 훈련을 받고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A와 B가 달리기 시합을 한다면, 출발하는 지점이 같다고 해서 공평할 수 있을까?


이는 특정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 모든 상황은 불공평하다. 《피의게임》과 같이 부모의 재력이나 내가 가진 돈에 따라 내가 먹는 음식의 종류와 질이 달라지고, 이는 위생적이거나 쾌적한 환경에서 쉴 수 있는 주거 환경이 달라지며 경쟁하는 컨디션이나 조건에 차이를 불러일으키고, 현재 또는 미래에 각광받을 능력을 예측하여 훈련받을 수 있는 기회조차 달라진다. 나아가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통해 비합리적인 선택을 유도해서 불공평함의 정도를 가중시키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이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성인이 되어서는 단지 '노력'으로 메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 피의게임 of Wavve. All right reserved.

현재의 불공평한 현실은 어떻게 보면 이미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과 일지도 모르겠다. 《피의게임》의 주요 세 가지 능력은 현실에서도 생존하는 데 필요한 능력들이다. 생존게임에서 매일 탈락자를 선정하듯,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능력을 내걸고 불공평함 속에서 경쟁하며 살아간다. 사회가 불공평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를 바꾸려는 시도는 많지 않다. 《피의게임》 참가자들이 불공평한 게임인 것을 알지만, 게임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결과로 받아들이고, 사람들이 순응하고 산다고 해서 이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피지컬과 뇌지컬, 정치컬 등의 능력은 온전히 혼자만의 성취로 얻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압도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가진 능력이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때로는 이미 격차가 벌어져 간극을 메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에 남들보다 우위에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은 언제나 관계하는 동물이기에 개인만을 분리해서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심지어 불공평한 사회가 완벽하게 공평한 사회가 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현재 사회가 특정 집단에 불공평하게 구성되어 있음을 알리고, 그 정도를 줄여가도록 하는 과정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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